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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충효의 신앙 - 충효의 문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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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170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충효의 신앙

 

충효의 문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동력

 

 

우리 역사에서 순교는

 

우리 교회는 창설된 이래 1백여 년에 걸쳐서 치열한 박해를 받아왔다. 이 박해기간에 수만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를 지키고자 갖은 고통을 참아냈다. 이 박해기간에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직접 바친 순교자들은 2천여 명을 헤아린다.

 

특히 순교자들이 남긴 기록을 검토해 보면,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의심 없이 고백했다. 무엇이 그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했는가?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는가?

 

 

우리 문화의 특성

 

우리 신앙 선조들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인간의 기본도리를 가르친다고 확신했다. 박해시대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은 가톨릭 신앙과 전통문화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의 정신문화에서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는 충성과 효도에 대한 강조를 들 수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원형질처럼 자리 잡은 샤머니즘에서도 충성과 효도에 대해 강조했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는 지노귀굿에서 바리공주의 노래가 구연된다.

 

어느 임금님의 일곱째 딸 바리공주는 병든 아버지를 구완하려는 지극한 효심에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저승에 가서 특효약을 구해와 아버지를 살려냈다. 바리공주는 효심 때문에 죽었고 부활했다. 그의 효심은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 수 있는 신통력의 원천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 조상들은 죽음마저 극복할 수 있는 효심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불교신앙에서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같은 불경을 통해서 효도를 강조해 왔다. ‘인왕경’(仁王經)은 충성을 선양한다. 이 두 경전은 우리 문화체질을 형성시키고 강화해 주었다. 이렇듯 충효는 우리 문화 구성요소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다. 충효를 강조하고 존중하는 관행은 유교문화의 소산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지배층의 사상을 지배하던 유교문화에서는 특히 부모에 대한 효도와 함께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임금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육신(死六臣)의 사례에 감격해 왔다.

 

우리 문화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또 하나로 효(孝)의 문화가 있다. 전통문학 작품 가운데 널리 읽히는 작품으로 ‘심청전’이 있다. 주인공 효녀 심청이는 눈먼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데, 효도를 실천하여 목숨을 버린 전형이다. 그러나 심청이는 죽지 아니하고 연꽃을 타고 바다에 다시 올라와 왕비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마음씨는 효녀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심청이는 효심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다. 선조들은 그리스도 부활을 믿기 이전부터 효도를 통한 부활의 사례를 알고 기꺼워했다.

 

 

순교와 한국문화

 

우리가 간직한 문화에서는 이처럼 충효를 중시해 왔으며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실천하고자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아니했다. 이러한 정신적 특성은 위로는 높은 벼슬아치에서 아래로는 신분이 낮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공유되었다. 이리하여 충효는 우리 정신문화와 심성의 주요한 특성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박해시대 천주교 신앙에서도 충성과 효도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다. 단지 당시에는 충성과 효도의 기준을 하느님께 두었고 인간인 임금이나 부모에 대한 충효를 상대화해 나갔다. 충성과 효도에 대한 박해시대 천주교의 가르침은 삼왕래조후(三王來朝後) 제1주일 성경인 루카 복음 제2장에 대한 해설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는 성전에서 예수를 잃고 찾아 헤매던 성모 마리아에게 열두 살배기 소년 예수가 한 말을 풀이해 준다.

 

“어떤 이가 묻기를 ‘만일 부모가 나에게 이치가 아닌 것을 가르친다면 따라야 하겠는가?’라고 했다. 답하기를 ‘따르는 것은 아치가 아니다.’라고 했다. 성 베르나르도가 말하기를, ‘아랫사람들은 그 윗사람의 명령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

 

대개 명령은 윗사람에게서 나오며,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명령을 살펴볼 수 있으니, 만일 하느님의 명령이라면 따라야 하지만, 명령한 바가 이치에 맞지 않다면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음이 틀림없으니 어찌 이를 따르겠는가? 따르지 않음이 바로 효도이다.’ … 효도란 곧 대의를 따르는 것이다.”

 

이 성경의 가르침은 당시 조선사회에서 통용되던 무조건적 충성과 효도의 의미를 신자들이 재고하게 이끌었다. 그들은 전지전능하고 전선(全善)하신 하느님의 명령은 언제나 옳을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만일 옳지 않은 명령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명령이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대군대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가르침이 참다운 충성과 효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진정한 충성과 효도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우리의 문화는 충효를 실천하려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의 충신과 효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충효의 문화 위에 새롭게 꽃피운 천주교 신앙은 충성과 효도의 진정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참다운 가르침을 지켜 나가고자 하느님의 충신과 효자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였다. 그들은 하느님께 충성과 효도하려는 결단을 선비의 의연함과 열녀의 매서움으로 실천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심청이었으며 하느님의 사육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적인 전쟁터’에 나선 우리의 용맹한 군사였다. 그들은 천주가사의 노랫말대로 하느님의 충신이 되고 하느님의 효자가 되고자 노력했고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기도 했다.

 

 

맺은 말

 

물론 충효의 문화전통은 천주교 신앙의 전파에 지장을 주기도 했다. 초기교회의 일부 신도들은 부모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전통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효심은 일조의 고문처럼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자신의 문화를 조화롭게 이해했다.

 

그들은 자신의 문화를 통해 복음의 가르침을 재해석했다. 우리 문화의 시각으로 자신의 신앙을 해석했기에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 이상 남의 신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양인 선교사가 가지고 온 이질적 가르침이 아니라,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신앙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찾아낸 충효라는 가치의 완성이 순교 안에서 이제 막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문화와 가톨릭 신앙은 순교의 공동원천으로 작용하였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특성이다. 이 순교사례를 통해서 진정한 복음화와 신앙의 실천은 그 지역의 문화적 요소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문화의 편견을 떠나 자신이 선교하는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고, 여기에 복음의 시각에서 의미를 부여해 줄 때 그 지역의 복음화는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7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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