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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 놀라운 문예부흥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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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168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 놀라운 문예부흥의 그늘

 

 

신성 동맹으로 대립 공의회를 극복하고

 

공의회 우위설이 휩쓸고 간 유럽에서 세속군주들은 자기네 영토의 통치에서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공의회 소집’이라는 정치 무기로 교황권을 위협하였다. 교황들은 공의회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교황과 전쟁을 일으키며 1511년에 피사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참석자들은 거의 프랑스인이었다. 이에 맞서 교황 율리오 2세는 1512년 4월 19일 라테라노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실제로 율리오 2세는 2년 안에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비오 3세가 즉위 26일 만에 죽은 뒤 열린 콘클라베에서 불과 몇 시간 만에 가장 빨리 교황으로 뽑혔다.

 

그렇지만 그런 불법적인 서약에 매일 교황은 아니었다. 그는 교황직의 주요 과제를 교황령에 대한 통치권의 확립으로 여겼다. 불굴의 무장다운 풍모로 교황은 모든 교황령에서 통치권을 확대하고 이탈리아에 대한 외세의 개입을 막아내겠다는 의욕을 보였으며, 막시밀리안 황제 등 세속군주들과 신성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다. 그러고 나서야 교황청과 교회 개혁을 위하여 약속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세속 통치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였지만, 교회의 영신 지도자로서 베드로의 직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 족벌주의 등을 타파하고, 강생의 신비에 대한 이단을 단죄하고, 수도원을 개혁하고자 엄격한 칙서들을 발표하였다. 그는 또한 예술의 보호자로서 르네상스 예술의 거장들인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을 후원하며 베드로 대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메디치 가문의 영화 속에서

 

열여덟 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지난 두 공의회와는 달리 중세 교황 전성기의 공의회들처럼, 교황이 직접 주재하였다. 1512년 5월 10일에 열린 공의회에는 주로 이탈리아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등 유력한 세속 군주들도 피사 대립 공의회를 반대하고 라테라노 공의회를 지지하였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죽자 프랑스의 루이 12세도 피사 공의회를 중지시키고, 반대파 추기경들도 새 교황 레오 10세에게 굴복하였다. 38세의 젊은 교황은 우려와 함께 각계각층의 기대를 모았다. 메디치 가문의 영화 속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삭발례를 받고 열세 살에 추기경에 임명된 그는 르네상스의 교육을 받은 훌륭한 인품을 지녔었다. 익살과 풍자의 대가였던 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온갖 풍류를 즐기며 예술가와 문인들을 후원하였다. 격식을 버리고 문인들이나 재사들과 무람없이 어울렸다. 교황청을 극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로마를 환락의 중심지로 삼는다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풀며 살았다. 가난한 사람들, 병자, 불구자, 순례자, 학생, 퇴역 군인, 피난민, 온갖 불행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에게 막대한 자선을 베풀었다. 교회 문제에서도 모든 청원에 관대하였다.

 

그러자 교황청 재정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바젤 공의회에서 교황청에 보내는 모든 납부금과 세금을 완전히 폐지하여, 교황청의 재정 수입을 아무런 대안도 없이 박탈해 버린 것이 교황청의 재정 지상주의에 원인을 제공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패의 소지도 낳았다. 어떻든 메디치 가문에서 자란 교황은 재정 관리 같은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교황직을 두고 가난한 문인들의 기대만 채웠다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한다

 

새 교황은 공의회를 이어받았다. 프랑스와 교황권의 관계를 정교조약으로 조정하고, 공의회는 이를 11차 회의에서 승인하였다. 공의회에서는 인간 영혼의 불사불멸을 교리로 정의하였다. 이성을 지닌 인간 영혼의 본성이 사멸한다거나 모든 사람 안에 유일한 본성이 있다는 ‘경솔한’ 철학자들의 주장(특히 피에트로 폼포나치,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 또는 아베로에스주의)을 단죄하고, “영혼은 참으로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인간 육신의 형상일 뿐만 아니라 불멸하며, (개인의) 육신에 각기 따로 부어진다.”(신앙 규정 편람, DS 1440-1441)고 규정하였다.

 

교황과 공의회의 개혁 의지에 불신이 서리기도 하였지만, 공의회에 제출된 개혁 소견서에서는 폐습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만이 아니라 교회법 개정, 수도회 제도의 개혁, 전례의 통일 등에 관한 적극적인 개혁안들과 더불어 얼마 전에 발견된 신대륙 선교 문제까지 논의하였다. 공의회는 매우 유익한 개혁 교령들을 발표하였다.

 

제8차 회의는 교황청의 조세 제도, 제9차 회의는 주교 선출과 종교 교육, 교회재산의 보호, 제10차 회의는 ‘신심의 산’(교회 공인 전당포)과 서적 검열, 제11차 회의는 탁발수도자들의 설교 등에 관한 개혁 조치들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개혁 조치들을 엄격히 시행하려는 의지가 모자라, 공의회의 개혁은 변화된 세계에서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교회의 앞날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레오 10세도 새로운 르네상스인이었지, 개혁 교황은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권이 놀라운 문화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개혁의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1517년 3월 16일 제12차 회의로 막을 내렸다. 그해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95개 명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내걸었다.

 

 

가난한 이를 돕는 전당포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해진 것이 이른바 금융업이었다. 중세 때는 돈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그렇지만. 성당에서는 이자를 받는 것을 죄라고 여겼기 때문에 돈을 꾸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돈놀이는 주로 유다인들이 했다. 유다인들은 온갖 산업과 교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그런 차별이 엄청난 특혜로 변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전당포’를 운영한 초기 금융업자들은 여러 자리에서 피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들로 묘사된다. 그래서 주교나 수도자들이 나서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런 전당포를 신심의 산(Montes Pietatis)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수익이 따로 없는 그런 기금은 오래가지 못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래서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인건비 등 필요경비만을 받는 전당포를 운영하여 가난한 신자들을 도와주며, 그러한 자선기금의 자생력을 길렀다.

 

이 전당포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설교자회(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이자를 받는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래서 공의회는 이자가 아닌 필요경비만을 대부자의 동의 아래 받는 ‘사랑의 산’을 승인하였다(DS 1442-44).

 

우리나라에서도 신용협동조합은 성당에서 시작되었다. 이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자가 아닌 필요경비만을 받는 신용조합이, 어디 가서 돈 한 푼 빌릴 수 없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신용조합이, 그리스도인들이 쌓아가는 진정한 ‘사랑의 산’이 여러 곳에 우뚝 솟아오르기를 빈다.

 

* 강대인 라이문도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번역실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9월호, 강대인 라이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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