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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우리 교회사에 나타난 첫 사도직 단체, 명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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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167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우리 교회사에 나타난 첫 사도직 단체, 명도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에서 하느님을 따른다는 말은 단순히 개인적인 결단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그 말씀을 전하며 행동으로 증언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이러한 직무를 ‘사도직’이라 한다. 여기에는 성품성사나 특별한 의식 등을 통해서 주어지는 ‘교계적 사도직’이 있고, 세례성사를 통해서 신자가 된 일반인들이 실천하는 ‘평신도 사도직’도 있다. 이 사도직은 교회 내에 조직된 단체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실천된다. 우리나라 교회사에 최초로 나타난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는 명도회(明道會)가 있다.

 

 

명도회가 만들어진 까닭

 

명도회는 1795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베이징에 조직되었던 신앙단체를 모델로 삼아 설립한 조직이었다. 이 명도회는 “회원들 간에 서로 돕고 격려하며 종교의 깊은 지식을 배워 얻고, 그러고 나서 이것을 교우들이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명도회가 설립된 배경에는 먼저 교리에 대한 학습의 필요성을 들 수 있다. 교회창설 당시 신도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한문 교리서를 통해서 스스로 교리를 공부하고 신자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교회 초기 지도자들은 교리상 결코 허용되지 않는 ‘가성직제도’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처럼 교리지식이 부족했던 당시의 신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교리의 학습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를 위해 명도회를 조직했다.

 

또한 명도회는 혈연 중심의 선교방법을 극복하고자 채택된 선교조직이기도 했다. 가문의 구성원을 위주로 한 선교는 그 한계가 분명했다. 따라서 가문을 뛰어넘어 신앙을 매개로 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려면 새로운 선교방법이나 조직이 필요하였다. 명도회는 이러한 당시 교회사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조직될 수 있었고, 이로써 박해시대 가톨릭 신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된 보편적 신앙으로 전환하는 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명도회가 창설된 시점은 1796년 부활절(4월) 이후부터 명도회에 관한 기록이 확실히 등장하는 1800년 4월 사이의 어느 때로 생각된다. 초대 명도회 회장으로는 다산 정약용의 친형인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이 임명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활동이나 회장 정약종의 존재 등을 감안할 때, 명도회는 서울에서 창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해시대의 명도회는 일종의 비밀결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명도회를 교회나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떳떳한 사도직 단체였지만, 정부 쪽에서 보자면 명도회는 비밀결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 명도회의 조직은 여러 소규모의 말단조직으로 다시 나뉘었다. 곧 명도회의 활동단위가 되는 최말단 조직은 3~4인이나 5~6인 정도의 소규모 인원이 모여 형성된 일종의 분회(分會)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말단조직의 존재는 1801년 당시까지 적어도 여섯 개가 있었다.

 

 

명도회에서 활동한 이들

 

명도회의 말단조직은 서너 명이나 대여섯 명의 소규모 인원을 모은 뒤, 그 명단을 주문모 신부에게 보고함으로써 결성되었다. 그리고 천주교 서적을 강습했으며, 천주교 입문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1년이라는 일정한 시험기간을 두고서 그간의 성취도를 참작해서 입회 여부를 결정했다. 또한 해마다 말에는 교리공부와 전교활동의 성과에 대해서 보고했다. 이러한 연간보고는 명도회 입회 희망자의 입회 여부를 결정하는 판단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의 상황이나 활동에 관한 보고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당시 교회의 회장들이 지도하는 데 주요한 참고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명도회의 지도자들은 조직의 기초를 세우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자 일정한 규칙을 마련하였다. 1801년 조선정부 당국에서 압수한 책 가운데 “명도회규”(明道會規)라는 제목의 책자가 확인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명도회 회원들은 회칙을 필사해 두고 평소에도 이를 학습했으며, 회칙에 따라 행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도회의 존재는 천주교의 전파와 보급에 상당히 기여했다. 주문모 신부의 포교활동도 이러한 명도회의 말단조직을 거점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그가 서울에서 주로 머물던 곳도 명도회의 말단조직원 가운데 하나인 홍필주(洪弼周)의 집이었다.

 

명도회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도 활동하였다. 주문모 신부에 관한 기록 가운데는 그가 “집회 장소를 정하고, 집회를 주관한 지도자를 임명했고, 남녀가 따로 참석할 것을 정하는 등 모든 것을 무게 있고 절도 있게 조정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여성 명도회원이 있었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801년에 순교한 양재궁의 송씨(宋氏)와 그의 자부 신씨(申氏)가 명도회원이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여성회원의 존재가 직접 확인되었다. 이렇듯 명도회는 박해시대 남녀 교우들을 아우르는 신자조직이었다.

 

명도회 조직은 주문모 신부의 지방 여행과 함께, 서울 이외의 충청도나 전라도 지방으로까지 확대되어 나갈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명도회의 활동은 정약종이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하더라도 주문모 신부에게까지 보고되었다. 따라서 명도회에 관한 일을 최종적으로 관장한 인물은 주문모 신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도회는 1801년의 박해로 그 조직이 무너졌다. 이 박해과정에서 명도회의 창설자인 주문모 신부와 명도회장 정약종은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명도회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던 많은 이들이 살아남지를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명도회가 이 땅에서 그 수명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교회는 1801년의 박해 이후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던 상황에서도 재건되고 있었다.

 

교회의 재건에는 명도회를 통해 훈련된 신자들의 구실이 컸다. 교회재건 활동에 참여하던 인물 가운데는 이경언(李景彦)이 있었다. 그의 형과 누나는 1801년의 박해 과정에서 순교했다. 박해 이후 그는 모친과 형수와 함께 서울에 살면서 성경을 필사하고 성화를 그려서 교우들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명도회 재건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이주했고, 1827년 전라도 지역에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체포되어 전라감영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이경언은 죽기 며칠 전 감옥에서 명도회 회원들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이 모이실 적에 내가 빠짐으로 해서 좀 쓸쓸하고 섭섭한 느낌이 드시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차라리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이 막중한 (순교의) 은혜를 하느님께 감사해 주시오. 나는 회원 한 분 한 분을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는 것 같기까지 합니다.”

 

 

나머지 말

 

주문모 신부는 박해받던 조선교회를 위해서 명도회를 창건했다. 그 회원들은 박해를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가르침을 여기에서 얻었다. 그리하여 박해시대 명도회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다.

 

1801년의 박해가 끝난 다음 교회의 재건과 명도회의 재건은 흐름을 같이한 사건이었다.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은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명도회 회원 하나하나를 기억하였다. 이경언의 사례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처럼 명도회는 박해시대 신자들의 활발한 활동을 상징하며, 신자들 간의 친밀한 결속을 나타내는 조직이었다.

 

이 교회 조직의 전통은 오늘날 평신도 사도직을 실천하는 모든 단체에서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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