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 교황 수위권의 재확립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7 ㅣ No.166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 교황 수위권의 재확립

 

 

서방 교회는 대분열이라는 시련을 겪으며, 공의회가 교황권보다 우월하다는 이른바 공의회 운동이 번졌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의 분위기가 그랬다. 그래도 그 공의회에서 교회 분열을 종식시키고 마르티노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마르티노 5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발표된 공의회 교령(Frequens)에 따라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교령은 보편 공의회를 항구적인 제도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새 공의회는 5년 뒤에,다시 7년 뒤에 소집하고, 그 다음부터는 10년마다 열도록 하였다. 공의회를 교황권에 대한 일종의 감독 기구로 여긴 것이다. 어떻든 마르티노 5세는 이 교령에 따라 파비아로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역병이 번져 시에나로 장소를 옮겼다.

 

공의회는 개혁 논의를 시작하려다가 해산되고 말았다. 참석자가 적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다시 7년 뒤인 1431년에 교황은 바젤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마르티노 5세가 죽고,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의 조카가 에우제니오 4세 교황으로 뽑혔다. 교황사절이 1431년 7월 23일에 제17차 세계 공의회를 개회하였으나, 참석한 주교는 하나도 없었다. 거의 대리인들이었다. 교황은 공의회를 해산시키겠다고 하면서, 그 장소를 볼로냐로 옮겼다. 그래도 바젤에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공의회가 교황에게 복종을 거부한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공의회 해산 철회를 요구하며, 교황을 공의회에 소환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와 일부 세속 군주들도 공의회를 지지하였다. 갈등이 두 해 넘게 계속되었다. 마침내 교황이 양보하여 해산 칙서를 철회하고, 바젤 공의회를 적법한 공의회로 인정한다고 선언하였다.

 

 

공의회 우위설의 실천

 

그 사이 공의회는 이른바 공의회 우위설을 실천하고 공의회를 교회의 최고 법정과 최고 행정 기관으로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관청과 관료 조직을 정비하고, 교회록과 대사를 수여하며 재판을 하였다. 바젤 공의회에는 콘스탄츠 공의회보다 더 많은 대리인들과 학자들이 참석하였다. 주교들은 전체 참가자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

 

공의회는 신앙 ? 평화 ? 개혁 ? 공동 관심사 네 개 위원회를 두고, 중앙위원회가 전체를 통괄 지휘하였다. 공의회 참석자들은 누구나 이들 위원회에서 표결권을 가졌다. 공의회는 근대 의회와 유사하여, 실권과 업무를 넓혀 나갔다. 1436년까지 수많은 개혁 조치들이 논의되고, 주목할 만한 결의사항들이 발표되었다. 정례 관구회의와 교구회의의 개최, 전례 개혁, 성직자의 폐습 개혁을 결의하는 한편, 교황령에 부과하는 세금의 완전 폐지로 교황청의 수입을 아무런 대안 없이 박탈해 버렸다. 새로운 교황 선거법도 공포하였다. 교황의 권력을 제한하고 그 집행권을 공의회가 독점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로마의 폭동을 피해 피렌체에 거주하던 교황이 공의회에 여러 차례 항의하였으나,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동방 교회가 일치를 회복하자고

 

오스만 투르크 족의 압박에 시달리던 비잔틴 황제 요한 8세 팔라이올로구스는 서방의 동맹과 원조가 절실해졌다. 황제가 서방 교회와 화해하는 교회 일치의 회복을 그 전제 조건으로 여긴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교회의 일치 공의회를 소집하는 문제를 교황과도 바젤 공의회와도 협의하였다. 그리스인들은 교황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유리한 페라라로 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교황은 1437년 9월 18일에 바젤 공의회를 페라라로 옮겼다. 그러나 다수파는 바젤에 그대로 남았다. 바젤에 남은 급진주의자들은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우위를 믿을 교리로 선언하고, 이를 거부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이단자로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해 11월 5일에 사보이 공작 아마데우스 8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하여 펠릭스 5세로 내세웠다. 펠릭스 5세는 자신의 부유한 재산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는 공의회를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교회 분열을 종식시킨 공의회 우위설이 바젤에서는 교황사의 마지막 대립교황을 새롭게 내세웠다. 이것이 공의회 우위설의 가장 큰 과오였다.

 

1438년 1월 8일, 페라라 주교좌성당에서는 그리스 정교회와 일치 공의회가 열렸다. 비잔틴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동방의 총대주교들은 물론 키예프의 대주교도 참석하였다. 교리위원회에서는 그리스인들이 라틴 교리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라틴인들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토론을 진행하였다. 열여섯 차례의 회의 후 장소를 피렌체로 옮겼다. 여기서 1439년 2월 26일에 첫 번째 전체 회의가 열리고, 힘든 논의를 거쳐 7월 5일에 그리스인들과의 일치 교령이 서명되고 다음 날 발표되었다. 그리스인들을 위한 교령 ‘하늘아 기뻐하여라’(신앙 규정 편람, DS 1300-1308)는 “성령께서는 영원으로부터 하나의 근원에서 유일한 발출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고 하였다.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보편 교회를 다스릴 권력을 지닌다는 수위권도 명시되었다. 11월 22일에 아르메니아인들과의 일치가 뒤따랐다(DS 1310-1328). 콥트 교회와 일치를 확정한 야곱파에 대한 교령은 이듬해 2월 4일에 발표되었다(DS 1330-1351). 공의회는 1443년 4월 26일에 장소를 로마 라테라노로 옮겨 1445년 8월 7일까지 다른 동방 교회들, 곧 메소포타미아의 시리아 교회, 키프로스의 칼대아 교회, 마론파 교회 등과 일치를 결정하고 공의회를 마쳤다.

 

여러 곳을 옮겨 다닌 이 공의회를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라 하고, 이를 줄여서 피렌체 공의회라고도 한다.

 

 

개혁의 요구는 그대로 남아

 

그러나 서방 교회에 대한 그리스 성직자들의 반감은 투르크족에 대한 공포만큼이나 컸는지 모른다. 러시아 정교회에 공의회의 결정을 전하려는 키예프의 대주교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할 때에 동맹을 위하여 떨치고 일어난 서방 사람도 하나 없었다. 한편 바젤 공의회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재정난 때문에 대립 교황이 거주하던 로잔으로 옮겼으나, 너무 급진적인 개혁 주장으로 지지자들을 다 잃고 말았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1447년에 죽고, 니콜라오 5세가 새 교황으로 뽑혔다. 독일 사람들이 니콜라오 5세와 빈 정교조약을 무기한으로 체결하고 프랑스마저 새 교황편이 되자, 마지막 대립 교황 펠릭스 5세가 1449년 4월 7일에 사임하였다. 바젤 사람들은 새 교황이 공의회 우위설을 받아들인 것으로 믿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교황의 권위는 회복되었으나, 교회 개혁의 요구는 다음 세기에 더욱 세차게 솟구칠 것이었다.

 

* 강대인 라이문도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번역실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8월호, 강대인 라이문도]



55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