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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비엔 공의회 - 성전 기사단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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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5 ㅣ No.161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비엔 공의회 - 성전 기사단의 비극

 

 

교황권의 부침 그리고 아비뇽

 

13세기말, 두 해가 넘도록 새 교황을 뽑지 못하다가 한 은수자를 교황으로 뽑았으나, 석 달 반 만에 교황직에서 물러났다. 다음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강력한 교황권을 확립하고자 하였고, 중앙집권제를 다지려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Le Bel)와 부딪쳤다. 교황은 칙서 “하나이며 거룩한 교회”(Unam Sanctam)를 발표하였다(1302년 11월 18일). 이른바 “양검론”(兩劍論)을 바탕으로 세속의 권력은 영적인 통치권에 복종하여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이다”(DS 875). 중세 교황권이 절정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필리프 4세를 파문하였다.

 

이듬해 필리프의 사절이 폭도들을 데리고 나타나 교황에게 퇴위를 강요하며 사흘 동안이나 감금했다. 교황은 죽고 교황권은 몰락했다. 그 다음 후계자들로는 프랑스 왕 필리프의 입맛에 맞는 프랑스 추기경들이 뽑혔다. 클레멘스 5세는 아예 로마로 들어갈 생각도 안 했다. 새 교황은 리옹에서 대관식을 치르고(1305년), 보르도와 푸아티에 등지에 머물다가 1309년 아비뇽에 정착하였다. 기후가 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그 영지를 금화 8만 냥을 주고 사버렸다. 이때부터 67년 동안 이른바 교황의 “바빌론 유배”가 이어지지만, 실제로 프랑스 출신 교황들이 스스로 한 선택이었지, 포로 생활이나 “유배”는 아니었다.

 

 

빚을 갚은 가장 쉬운 방법

 

1307년 10월, 13일의 금요일. 필리프 4세는 프랑스에 있는 성전 기사단의 회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잔혹한 고문으로 이단 혐의를 잡아 내려고 하였다. 필리프는 프랑스 안에 있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의 영지를 빼앗으려고, 한때 십자군 원정의 동지였고 처남인 에드워드 1세와 7년에 걸쳐 두 차례 전쟁을 하였다. 필리프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조달하느라 금융업을 하는 유다인들에게 빚을 많이 졌다. 빚을 갚을 길이 없던 그는 1306년에 유다인들을 체포하여 그 재산을 몰수한 다음 추방해 버렸다. 일거양득이었다. 왕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빚을 해결하고 또 엄청난 재산까지 챙긴 것이다. 다음 해에는 역시 커다란 빚을 지고 있던 ‘성전 기사단’이 그 과녁이 되었다.

 

 

첨단의 경영 기법을 지닌 다국적 기업

 

본디 이 수도회는 제1차 십자권 원정 되에 성지 회복과 순례자 보호를 위하여 세워졌다. 하얀 망토에 적십자를 한 이 기사들은 “솔로몬 성전과 그리스도의 가난한 형제 군인들”로서 성지 회복과 보호를 위하여 실제로 이슬람과 싸우는 가장 용맹한 전사들이었으며, 검은 옷을 입은 다른 회원들은 성지를 순례하는 신자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하는 수도자들이었다. 1129년 트루아 지역 공의회가 수도회 설립을 승인하고, 10년 뒤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면속 수도회로 인정하였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통행료나 관세, 온갖 세금 등을 면제받고, 교황의 권위에만 속하게 된 것이다.

 

베드나르도 성인 등의 찬사에 힘입어 이 기사단의 용기와 명성은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유럽의 항구에서 맡은 재물의 가치를 문서로 증명하여 주고 성지에서 그 문서를 제시하는 순례자에게 돈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수표나 신용장 같은 금융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유럽 각지의 신자들에게서 많은 토지와 기부금이 들어왔다. 또 여러 곳에 성채와 성당을 건축하였다. 이 거대한 재산을 운용하는 방식도 대단히 효율적이어서, 요즘 표현으로 최첨단의 경영 기법을 지닌 다국적 기업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 목적은 영리 추구가 아니라 영혼 구원이었다. 성전 기사단은 급속히 발전하였지만, 십자군 원정의 총체적 실패와 성지의 상실로 본래의 임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기사단의 폐쇄와 교회 개혁

 

필리프 4세의 하수인 같은 처지로 전락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성전 기사단을 폐쇄시키라는 왕의 요구에 시달렸다. 왕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사후 재판을 거듭 요구하면서 기사단 폐쇄를 압박하였다. 교황은 비엔에서 공의회를 열기로 하고 소집 대상자를 미리 왕과 협의하였다. 20명의 추기경과 150명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 그 밖에 많은 대리인들이 참석한 이 공의회는 1311년 10월 16일에 열렸다.

 

교황은 공의회 소집 목적을 성전 기사단 문제, 성지 회복, 교회 개혁과 자유라고 제시하였으나, 다음 회의 날짜를 알리지 않았다. 다만 성전 기사단 조사위원회 구성을 지시하였다.

 

교황은 재판관들을 임명하며, 고문으로 받은 신문 조서만 믿지 말고 실제로 기사단 측에도 변호의 기회를 주라고 당부하였다. 그해 겨울 내내 기사단 심리가 계속되었다.

 

교황은 필리프 4세와 타협을 하여 공의회의 판결이 아닌 교황의 행정 처분으로 기사단을 폐쇄하는 대신,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재판은 중단하기로 하였다.

 

1312년 4월 3일 제2차 회의에서 기사단 폐쇄를 공포하였다. 그 재산은 요한 기사 수도회에 넘기도록 하였다. 성전 기사단의 마지막 대원장(Grand Master) 자크 드 몰레는 두 해 뒤 파리에서 화형을 당했다. 성전 기사단이 유럽에서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 뒤, 성배 전설 등 많은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떠돌고 있다. 지난해에 기사단 재판 관련 비밀문서들이 출판되었다. 기사단 탄압은 부당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비엔 공의회에서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청빈 의무에 관한 회헌 문제도 논란이 되었다. 또한 강대해진 국가 권력이 교회 권력에 간섭하는 문제, 그리고 교회 권력의 중앙 집중에 따른 주교들의 관할권 문제들을 논의하고, 그 폐해에 대한 개혁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들은 1317년에 후임자 요한 22세가 일부 수정을 한 뒤 “클레멘스 법령집”으로 편찬한 다음에야 그 효력을 발생시켰다. 공의회는 1312년 5월 6일 제3차 회의로 폐막하였다. 이 회의에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자기 아들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원정에 나서겠다고 서약하였으나, 빈말로 그치고 말았다.

 

[경향잡지, 2008년 5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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