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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2차 리옹 공의회 - 교회 일치를 선언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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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5 ㅣ No.159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2차 리옹 공의회 - 교회 일치를 선언하였으나

 

 

교황궁이 언제나 로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도자로 살다가 뜬금없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던 에우제니오 3세가 로마의 폭도들을 피해 비테르보에서 즉위(1145년)한 뒤로, 로마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가 어려웠을 때에, 여러 교황이 그 도시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교황직을 수행한 프랑스 출신 우르바노 4세 때에 프랑스 추기경들이 많이 생겨났다. 다시 프랑스 출신인 클레멘스 4세가 족벌주의 종식을 선언하고 모든 친인척의 교황청 출입을 금지하였지만, 프랑스파와 이탈리아파로 나뉜 추기경단의 구성은 그대로였다.

 

 

부제가 엉겁결에 교황이 되고

 

클레멘스 4세가 비테르보에서 죽고 추기경단이 모였지만, 세 해가 다 되어가도록 새 교황을 뽑지 못하였다. 참지 못한 비테르보 시민들이 추기경들을 주교관에 감금하고, 겨우 먹을 것만 들여보냈다. 1271년 9월 1일 마침내 테오발도 비스콘티 대부제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그는 교황사절의 수행원으로서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성지를 순례하느라(제9차 십자군 원정), 예루살렘 왕국의 마지막 보루인 프톨레마이스(지중해변의 아코 요새)에 머물고 있었다. 추기경단의 긴급소환을 받고 돌아왔지만, 이듬해 2월 12일에야 비테르보에 도착하였다.

 

그는 마지못해 교황직을 수락한 뒤 3월에 로마로 들어가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고 3월 27일 그레고리오 10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동서 교회의 일치, 그리고 예루살렘 성지 회복이었다.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 간의 평화,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생활 개혁 또한 당면 문제였다. 그는 교황으로 즉위한 지 나흘 만에 총공의회를 소집하며 두 해 뒤에 리옹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하였다.

 

 

몽골 사절단이 도착하고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 5월 7일 리옹의 성 요한 성당에서 공의회를 직접 개회하고 주재하였다. 500명의 주교들과 60명의 대수도원장들, 천 명이 넘는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하였으며, 많은 세속 군주들과 그 사절들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이 너무 많아 교황은 제2회기에서 기명 초대장을 밪지 않은 사람들의 참석을 제한하기까지 하였다.

 

이 공의회에는 몽골 일한국의 칸 사절단이 초대를 받아 참석하였다. 징기스칸이 공의회에 초대를 받았다고 하는 자료도 있으나, 그는 이미 죽은 뒤였고, 그의 손자 훌라구가 페르시아 지방에 세운 일한국의 두 번째 칸 아바카를 초대한 것이었다. 아바카는 불자로서 무슬림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나, 십자군과는 동맹을 맺고 그리스 황제의 서녀 마리아 데스피나와 혼인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화에 십자가를 그리고 “오직 한 분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아랍어로 새겼다.

 

아바카 칸은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공의회의 환영을 받고 십자군 원정에 협력하기로 하였다. 몽골 사절단 가운데 두 명이 공의회의 장엄 전례에서 세례를 받아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성지 회복을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에도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교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교황이 ‘신앙의 열정’으로 성지 회복을 외쳐도, 십자군 원정을 서약한 세속 군주들은 권력과 돈만을 쫓아갔다. 특별히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장삿속은 성지 회복의 대의를 저버린 지 오래였다.

 

십자군 원정으로 생겨난 예루살렘 왕국도 라틴 제국도 거의 허울만 남았다. 십자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그럼에도 십자군과 동행한 적이 있던 새 교황의 성지 회복을 향한 열정은 대단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위하여 6년 동안 모든 교회록에서 수입의 10분의 1을 교황에게 보내도록 공의회에서 결의하였다. 무거운 부담이어서 반발도 많았지만, 교황은 회의장의 공개 토론이 아니라 관구별로 따로 설득을 하여 십자군 지원에 대한 동의를 받아낸 것이다. 당장에 성전 기사단을 동원하여 다시 성지 회복에 나서자는 성급한 주장도 있었지만 보류되었다. 십자군 원정을 위한 모금에는 성공하였지만, 교황의 죽음으로 성지 회복의 열망은 또 한 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토록 염원하던 교회의 일치

 

다른 이유도 많았겠지만, 교리의 빌미로만 보면,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는 신경의 표현으로 동서 교회는 완전히 갈라졌다. 그런데 비잔친 제국의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교회 일치의 계기가 이루어졌다. 라틴 제국을 몰아내고 비잔틴 제국의 부흥을 추구하던 황제에게는 서방과 교황의 지원이 절실하였다. (한때는 로마 제국이 세 가지 이름으로 동시에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서방에 신성 로마 제국이 있고, 동방의 비잔틴 로마 제국, 십자군이 성지로 가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여 세운 라틴 로마 제국이 있었다.)

 

황제는 먼저 ‘보편 신앙’에 관한 서한을 교황에게 보내, 그동안 동방 교회에서 이의를 달았던 교리 문제들을 서방의 표현으로 바꾸고, 연옥과 칠성사에 대한 교리 그리고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또한 온전하고 완전하며 참된 하느님이신 성령을 믿습니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고 같은 본질이시며 똑같이 전능하시고 똑같이 영원하심을 믿습니다”(DS 853항). “거룩한 로마 교회는 또한 최고의 충만한 수위권과 전체 가톨릭 교회를 다스릴 최고 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DS 861항).

 

7월 6일 제4회기에서 황제의 이 신앙 고백이 낭독되고, 동서 교회의 일치가 장엄하게 선언되었다. 그러나 동방의 여러 감옥은 이러한 외교적인 통합에 반해하는 사람들로 메워졌다고 한다. 얼마 못가, 정치 환경의 변화로 교회 일치 또한 사라져버렸다.

 

공의회에서는 교황 선거(콘클라베: 추기경들이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채 사흘이 지나도록 교황을 뽑지 못하면 아침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닷새가 지나면 빵과 물만 주도록 규정)와 주교 선출, 탁발 수도회의 특권 등 교회 개혁에 관한 문제들도 논의하여 31개장의 결의를 채택하고 7월 17일에 폐막하였다. 공의회 결의 사항들은 교황의 일부 수정을 거쳐 그해 11월 1일에 발효되었다.

 

공의회는 루돌프 1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성지 회복과 교회 일치를 향한 열정은 너무 빨리 찾아온 교황의 죽음(1276년 1월 10일)과 함께 묻혀 버렸다. 교회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를 복자로 공경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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