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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초기 교회 신자들의 성무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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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4 ㅣ No.15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초기교회 신자들의 ‘성무집행’

 

 

우리나라에 천주교 신앙이 도입되던 초기의 역사에서는 신앙을 실천하고자 하던 평신도들의 열정적 자세를 주목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그 열정의 발현 과정에서 어이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하나의 사례로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또는 가성무집행제도(假聖務執行制度)로 불리는 사건을 들 수 있다. 이는 초기 신자들 가운데 지도급 인사들이 고해성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하거나 미사를 봉헌하던 행위를 들 수 있다. 물론 가톨릭 교회에서 원래 성무를 집전하는 일은 합당한 권한을 부여받은 성직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초기 교회의 지도급 신자들에게서 드러나는 선교에 대한 열정과 교리에 대한 무지가 복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평신도 ‘성무집행’의 배경

 

우리나라의 초기 교회사에서 드러나는 이 특징적 사건의 배경에는 먼저 천주교 교리를 편향적으로 이해하거나 교리에 무지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교회 창설 직전의 탐구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내용은 1783년 이벽(李壁, 1754-1786년)이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에게 말한 것처럼 “하느님의 존재와 천지창조, 천신과 악마의 구별, 세상의 시작과 종말, 영혼과 육신의 결합, 후세에서 착한 이는 상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 것” 등 교회의 4대 기본교리를 중심으로 한 사항이었다. 당시 교회의 책자에는 전례신학이나 교계제도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편 우리나라 초기 교회의 지도급 신자들이 일종의 성직자단을 구성할 수 있었던 사실은 당시의 유교적 문화풍토와 관련이 깊다. 유교에서는 성직자를 따로 교육하거나 구별하지 않았고 집안의 어른이 제사를 주도했다. 따라서 그들은 유교식 제사 때에 가장이 제관 곧 성직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새로운 교회에서도 그와 같은 역할을 자신들이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돌이켜보건대 이승훈은 베이징에 가기 전에는 이벽이나 권일신처럼 천주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다. 또한 베이징에 가서도 천주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학습한 바가 없었다. 그가 베이징에 가서 선교사들을 만나 처음으로 요청한 것은 수학과 기하학에 대한 지식이었다. 그러나 이에 머물지 않고 이벽의 부탁대로 교리에 관해 물었고, 자신의 동료들처럼 기본교리를 인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사전례에 참례하여 이를 살펴보았지만 교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교회 초창기의 주요 지도자인 이승훈의 경우도 하느님의 존재와 천지창조, 강생구속과 상선벌악 등과 같은 천주교의 기본교리는 당시의 다른 신자들처럼 확실히 이해하였을 것이나 교회 전례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이승훈이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조선의 문화적 배경과 전례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독자적 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한편 그들이 평신도로서 ‘성무’를 집전할 때 “얼굴에 흰 분칠을 하고 있었다.”는 이기경(李基慶)의 관찰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미사의 참뜻을 이해하기보다는 미사를 집전하던 서양신부들의 흰 얼굴을 더 주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평신도 목자들의 선출과 해산

 

교회가 창설된 후 계속되는 교회 탄압에도 당시 교회는 상당히 발전하여 신자들의 숫자가 1천 명을 웃돌았다. 이 상황에서 권일신 이승훈 등은 이미 새로운 신자들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1786년 봄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자신들보다 더 새내기인 신자들의 신앙을 굳게 하고자 ‘성직제도’를 세우기로 합의했고, 이때 이승훈, 권일신, 홍낙민, 유항검, 이존창 등 10여 명이 목자(pasteurs)로 선출되었다.

 

이 평신도 목자들은 먼저 고해성사부터 시행하였다. 한편 이승훈은 이미 베이징에서 주교와 신부로 구성된 교계제도를 보았다. 조선의 신자들도 교리서를 통해서 미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목격한 바 있는 미사성제까지도 이땅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자신의 모든 기억을 되살렸고, 신자용 예식서와 교리서에 있는 여러 가지 설명을 참조하여 완벽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그들은 미사와 견진성사까지도 집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신부로 선출된 이존창(李存昌)은 미사를 드릴 때 금잔을 썼다 한다. 미사 때 신부들이 착용하던 제의는 화려한 중국비단으로 만들었지만, 제의의 모양은 조선양반들이 제사를 지낼 때 입는 옷과 비슷했다고 한다. 또 조선의 풍습에서는 옷뿐만 아니라 관을 써야 의관을 갖춘 점잖은 차림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머리에 관을 쓰고 미사를 지냈다. 그들은 신자들의 고해를 들을 때 단 위에 높은 의자를 놓고 앉았고, 고해하는 사람들은 그 앞에 서 있었다.

 

고해 후 보속으로는 보통 희사를 명했다. 더 중한 죄에 대해서는 엄한 부모가 개구쟁이 아이들을 다스릴 때처럼 신부는 직접 회초리를 들어 죄인들의 종아리를 쳤다. 그 신부들은 조선의 풍속에 따라 내외를 하여 처음에는 부인들의 고해를 듣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들이 하도 졸랐기 때문에 결국 부인들의 고해도 들어야 했다. 그 신부들은 신자들을 방문하여 성자를 집전하지는 않았으나, 신자들이 찾아와 이를 청할 때 들어주는 형식이었다. 그 신부들은 걸어서 다녔으며 언제나 허영과 교만을 피하도록 서로를 격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이 만들어지고 나서 얼마 후에 호남지역의 신부로 선출된 유항검(柳恒儉)은 교리서를 숙독하다가 그들의 성사집전이 무효이며 부당할 뿐만 아니라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찾아냈다(경향잡지 2008년 3월호 56쪽 참조). 유항검은 이승훈을 비롯한 그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내 즉시 성사를 중단하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성사 집행은 계속되었고, 1789년에 이르러서야 베이징의 선교사들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이 사실에 관해 정확히 알아오도록 요청했다. 베이징 주교의 통고는 1790년 조선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신도 공동체에서 선출된 그 신부들의 행위는 불법으로 판정되었고, 그들은 해산하였다. 이 때문에 양반으로서 엄청 체면을 구겼지만, 그들은 유교적 가르침의 정통을 중시하던 조선의 지식인답게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따르는 데에 기꺼이 순종했다.

 

 

맺음말

 

이 사건에서 우리는 초기 교회의 자발적 실천력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새롭게 터득한 믿음을 완벽하게 실천해 보려는 그들의 선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는 이에 관한 질문서에 대답하기를, “미처 알지 못하고 행한 일이기 때문에 죄가 될 것은 없지만 성사 집행을 즉시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데에 그쳤다.

 

평신도 지도자들이 성직자의 자격이 없으면서도 성무를 집전했기 때문에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를 해석하여 ‘가성직제도’ 또는 ‘가성무집행제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론 이들의 행위는 교회법상 올바른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그 목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의를 결코 낮추 평가할 수는 없으며, 이 행위로 인해 당시의 신자들이 누렸던 영적인 기쁨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들의 선의에 굳이 ‘가’(假)라는 부정적 의미를 함축한 접두어를 붙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이 사건을 ‘평신도 성무집행’이나 ‘평신도 목자들의 활동’으로 부름이 더 적합하리라 생각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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