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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1차 리옹 공의회 - 영혼들의 통치자는 몽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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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4 ㅣ No.157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1차 리옹 공의회 - 영혼들의 통치자는 몽진 중

 

 

교회가 황제의 권력에서 완전히 해방 된 것은 바로 프리드리히 2세 때였다. 그는 황제였던 아버지 하인리히 4세가 죽은 뒤 네 살 때에 시칠리아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듬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극진한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면, 어린 고아였던 그는 온갖 정적들로부터 왕좌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교황에게 충성을 바쳤다. 교황의 배려로 드디어 신성 로마 제국(독일)의 황제에 오르고,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와 교황령의 통치는 황제의 권력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그는 독일의 평화를 염원하여 교회의 주교들과 세속의 군주들에게 수많은 특전을 부여하였다. 신앙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교회에 많은 것을 양보하였다.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여 명실 공히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연히 교황권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두 권력의 갈등은 십자군 원정에 영향을 미쳤다. 황제는 여러 차례 십자군 원정을 하겠다고 교황에게 서약을 하였지만,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서약하고

 

그는 시칠리아 왕국을 합리적인 군주국으로 재조직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상속녀 이사벨라와 혼인을 하여,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예루살렘과 시칠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독일에서 군주들에게 황제로 선출된 아들을 반역죄로 잡아 감옥에 가두고 질서를 회복시켰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황제에 맞선 도시 동맹도 진압하였다. ‘영혼들의 통치자’인 교황의 권위에 ‘세계의 통치자’인 황제가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황제의 보호자였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죽은 뒤 교황이 한 번 더 바뀌었다. 교황의 전권 사절로 십자군 모병에 심혈을 기울이다 여든 살이 넘어서야 새 교황으로 추대된 그레고리오 9세는 즉위 사흘 만에 황제에게 온갖 구실을 내세워 수없이 미루어왔던 십자군 원정에 나서라고 명령하였다. 황제는 교황의 명령에 복종하여 1227년 마침내 성지를 향해 출항하였지만 사흘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황제마저 중병을 앓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은 십자군 원정 서약을 번번이 지키지 않는 황제를 파문하였다. 이에 맞서 황제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은 페루지아로 피신하였다. 화해를 위하여 황제는 다시 성지로 출항하며 교황의 축복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성지 회복만이 파문 철회의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마지못해 십자군 원정에 나선 황제는 수많은 군사들만 열병으로 잃고 돌아왔다.

 

교황의 파문은 세속 군주들 사이에서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황제는 실제로 교황령을 거의 장악해 버렸다. 교황은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황제는 로마로 가는 주교들을 체포하고, 직접 로마로 진군하였다.

 

그 와중에 교황이 죽었다.

 

 

교황은 로마를 탈출하고

 

첼레스티노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보름 하루 뒤에 죽었다. 황제의 군대가 로마를 포위하고 무력으로 추기경들을 위협하여 교황 선거에 황제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이미 교회에서 파문을 당한 처지였다. 추기경들은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황 자리는 1년 7개월이 넘게 비어있었다.

 

1243년 우여곡절 끝에 인노첸시오 4세가 교황으로 뽑혔다. 새 교황은 본래 황제의 친구였다. 황제는 새 교황에게 축하사절을 보내고 평화를 제안하였다. 교황도 평화를 바랐다. 전임 교황이 부당하게 황제를 핍박하였지 황제가 교회에 잘못한 것이 없다는 황제의 주장에, 황제가 체포한 주교들을 모두 석방하고 교황령에서 군대를 철수한 뒤 공의회를 소집한다는 조건으로 평화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붙잡힌 주교들이 풀려나지도 않고, 군대도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교활한 협상 전략을 구사하던 황제의 전력으로 보아, 새 교황은 신변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교황은 한밤중에 변장을 한 채 시종 둘만을 데리고, 황제의 군대가 포위한 로마를 탈출하였다. 프랑스 리옹에 도착하자마자교황은 1245년 1월 3일, 그해 6월에 총공의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하였다. 황제의 권력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찾은 것이었다. 교황은 거기서 6년 동안이나 머물렀다.

 

 

교회의 다섯 상처를 치유하여야

 

열세 번째 세계 공의회는 이렇게 소집 기간이 짧고 또 황제가 방해하여 150명 남짓한 주교들만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1245년 6월 28일 리옹 주교좌성당에서 열린 공의회 개막식에서 교황은 교회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슬픔에 비겨 개탄하였다. 곧, “성직자들의 비행, 사라센의 위협(성도 예루살렘의 상실), 그리스 교회의 분열, 타타르 족의 만행(몽골의 유럽 침공), 황제의 억압”을 적시하였다.

 

제1차 회의에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고발이 제기되고 황제 대리인 타데우스가 변론을 하여 황제가 공의회에 참석할 때까지 심리를 거듭 연기하였지만, 황제는 끝내 참석하지 않았고, 공의회는 7월 17일제3차 회의에서 황제를 서약 위반과 이단으로 폐위시켰다.

 

150명의 주교들이 서명한 폐위 교령을 전파하는 임무는 작은 형제회와 도미니코회의 탁발 수사들이 맡았다. 교황에게 황제의 폐위 결정을 강제 집행할 힘은 없었지만, 공의회의 이 결정으로 호엔슈타우펜 왕가는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교의 문제보다는 주로 세속의 통치 문제를 다루었지만, 22개 장의 공의회 결정은 각 대학에 보내져 “재판과 강의에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나중에 다른 사항들까지 합쳐 38개 헌장을 자신의 법령집에 수록하였다.

 

공의회는 성지 회복을 위하여 3년 동안 모든 교회록의 수입에서 20분의 1을 지원금으로 내고, 비정주 교회록에서는 연간 수입의 절반을 내도록 하였으며, 성모 탄신 축일을 8부 축일로 제정하였다. 추기경들이 교황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붉은 모자’를 쓰도록 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뒤에 로마로 돌아왔다.

 

[경향잡지, 2008년 3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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