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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 서울에 살던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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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4 ㅣ No.15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 서울에 살던 신자들

 

 

흔히 남대문이라고 부르던 숭례문이 불탔다. 아름답던 그문이 검은 숯덩이로 변했다. 지난 600여 년 동안 숭례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이민족의 침입을 견뎌냈고, ‘이괄의 난’과 같은 내란을 이겨내며 자신의 의연한 자태를 뽐냈다. 현대사회에 들어와서도 한국전쟁의 치열했던 시가전에서도 자신의 위엄을 잃지 않으며 이렇게 기나긴 역사를 감당해 왔다.

 

불타버린 남대문은 서울에서 전개된 천주교회의 역사도 묵묵히 지켜보았고, 그 역사가 성장해 갈 수 있던 통로 구실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의 우리가 보아온 그 남대문은 2백여 년 전부터 우리 믿음의 선조들도 아끼며 드나든 서울의 대표적 성문이었다.

 

 

서울의 신자들과 신앙공동체

 

서울에 살던 신자들 가운데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교회사 초창기 교회창설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이벽이나 이승훈의 존재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서울 인근지역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같은 인물들도 역시 서울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가던 지식인들이었다. 한글로 된 교리서 “쥬교요지”를 간행하여 우리 교회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정약종에게도 서울은 주된 활동공간이었다.

 

황사영과 같은 교회의 청년 지도자는 서울을 터전으로 삼아 활동했다. 내포지방 출신이었던 강완숙이 서울에 들어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남대문 안쪽에 있던 남창동이었다. 그리하여 이곳 남창동은 그가 새로운 여성 공동체를 모으기 시작한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서울은 18세기 말엽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숨어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던 곳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집이 도성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물론 1801년 박해 직전에 서울의 신앙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 사람들은 북촌지역 일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점차 서울의 양반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북촌 일대에까지 진출해 나갔다. 당시주문모 신부가 거주하던 강완숙의 집도 안국동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1799년에는 초창기 교회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던 정광수(鄭光洙)와 조섭(趙燮) 그리고 최해두(崔海斗) 등 세 명의 교우들은 벽동(오늘의 한국일보사 부근)에 각기 집을 사서 서로 이웃해 담장을 터놓고 정사(精舍: 종교시설)로 삼아 이곳에서 첨례를 지냈다. 어쩌면 벽동의 이 집회처는 우리나라 교회에서 신앙고백을 위해 공적으로 처음 마련한 공동의 장소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신앙 실천을 위한 북촌의 거점들은 1801년의 박해로 파괴된다.

 

박해시대 서울 신자들의 끈질긴 믿음은 교회재건 운동으로도 드러났다. 신자들의 노력으로 1835년 이후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 선교의 본부를 당연히 서울에 두었다. 1839년의 박해 때에도 서울에 살던 선교사와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그 박해가 끝난 다음 1840년대 고국으로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남대문 부근 돌우물골에 집을 얻어 비밀스럽게 전교하고 있었다. 1839년에 순교한 선배들의 뒤를 이어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도 남대문과 멀지 않은 순화동 등지에 은신처를 마련하여 조선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자 최형 성인은 남대문 밖에 자리 잡고 조그마한 상점을 경영하면서 살아갔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요시한 일은 교회 서적을 출판하여 보급하는 일이었다. 그가 살았던 당시 남대문 밖 약현(오늘의 중림동 일대) 일대는 인쇄소들이 모여 있었고 책자들이 출판되어 각처로 팔려 나갔다. 1866년 당시 정의배 회장의 집도 남대문 밖 자암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박해기 전 시대를 걸쳐 남대문 일원은 우리 교회사와 분리할 수 없이 밀접히 연결된 지역이 되었다.

 

 

신앙 공동체 구성에서 드러나는 특성

 

우리나라 초기 교회사의 전개는 실학사상의 수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이야기되어 왔다. 초기 신자들 가운데에는 실학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이수광이나 이익과 혈연적으로 연계된 사람도 있었다. ‘세례자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던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한다. 1801년 당시의 신자 가운데는 이덕무와 같은 실학자와 연계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천주교 신앙은 고급의 사상체계인 실학과 연계되어 해석되었고, 천주교 신자들도 당시 사회를 이끌던 지식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801년 이후 박해시대에 걸쳐 서울의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을 분석해 보면 이른바 ‘시정잡배’라 불리던 사람들이 상당수를 이룬다. 서울에 살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갑남을녀며 장삼이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몰락한 양반으로 삯전을 받고 어린이를 가르치는 훈장도 있었고, 중인으로 양반한테 차별을 강요당하는 역관이나 의원들도 있었다. 서울의 신자 중에는 직업군인이었던 훈련도감의 군사나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나인도 있었다.

 

이합규는 1801년 당시 서울의 신앙 공동체에서 지도적 자리에 있던 사람이다. 그는 성균관에서 아전살이를 하고 있었기에, 아마도 그곳에서 공부하던 정약용을 비롯하여 일부 청년들이 신자임을 알고내심 큰 자부심을 갖기도 했을 터였다. 당시 서울의 신자 가운데는 기름장수, 소금장수, 엿장수, 나막신장수, 김치장수와 같은 정겨운 직업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던 사람도 있었다. 목수, 염색 장인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수공업자도 발견된다. 한편 아들을 낳고자 천주교에 입교한 여성, 신병의 쾌유를 위해, 돈을 잘 벌 수 있다고 하여 입교했던 신자등, 그렇고 그런 사람들도 우리 신앙의 선조를 이룬다.

 

바로 이러한 서울 신자들의 특성에서 우리는 18세기 이후 조선사회의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하잘것없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천주를 공경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천주교 신앙을 통해 형성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지식인의 예리함과 민중의 건강함이 함께 있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목숨 걸고 실천해 나가는 열정과 힘이 있었다. 박해시대 당시 서울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분이나 지식 정도 그리고 재산의 유무를 떠나 일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추진하고 실천한 사람들이다.

 

 

남은 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후 가장 중심 구실을 한 지역은 서울이다. 서울에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순박한 서민들이 함께 모여 신앙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성곽에 둘러싸여있던 서울의 문들도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 교리서들은 동대문 곧 흥인문을 거쳐 서울에 들어왔다. 믿음 때문에 죽음을 선고받은 순교자들은 서소문을 거쳐서 성 밖 순교지로 나갔다. 반면에 서울의 숭례문 곧 남대문은 신자들이 넘나들고 선교사가 마음을 졸이며 통과했던 교회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 남대문의 문루가 불에 타 사라졌다. 그 문루 아래로 박해시대의 교회에서 주교의 명령을 전하던 파발꾼이 내달려가고, 성교회의 책자를 보급하고자 노력하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리하여 남대문은 순교자의 문인 서소문 못지않게 신앙의 기쁨을 전파하는 의미 있는 성문이 되었다.

 

그러한 대한민국 국보 1호 남대문이 소신공양(燒身供養)을 강요당했다. 남대문의 그 희생을 통해 우리는 마땅히 지켜야 할 모든 가치와 원칙이 이 땅에서 지켜지도록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계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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