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 절정에 이른 교황 권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3 ㅣ No.155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 절정에 이른 교황 권위

 

 

젊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년 재위)는 중세의 위대한 교황으로 여겨진다. 이탈리아세니 공작의 아들 로타리오 추기경이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죽은 날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열정에 넘치는 서른일곱 살의 젊은 교황은 적극적인 개혁으로 교회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도 비어있었다. 그는 세속 통치에서도 지혜를 발휘하여, 황제 선출에서부터 영토 분쟁의 조정, 군주들의 혼사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황제와 교황의 관계를 분명히 해두었다. 교회에 봉사하겠다고 다짐한 오토4세가 황제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배신을 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어린 프리드리히 2세를 황제에 앉혔다.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 선출을 둘러싼 분쟁을 계기로 영국의 왕들은 앞으로 교황의 봉신이 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교황은 귀족들이 존 왕에게 강요하였던 이른바 ‘대헌장’(Magna Carta)을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귀족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그 권리 헌장을 폭력으로 받아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럽 전역에 교황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었다. 노르웨이, 스웨덴 등북유럽과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 등 동유럽까지 교황이 직접 권위를 행사하였다. 교황은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성지 회복과 그리스 교회 통합, 비잔틴 제국의 라틴화라는 염원에 거의 다가섰으나, 베네치아 상인들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가톨릭 신앙의 충직한 수호자로서 이단자들의 움직임에는 엄격함을 보였다. 그는 교황으로 즉위할 때부터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가, 드디어 1213년 4월 19일에 제4차 라테라노*(각주 참조) 공의회 소집 칙서를 발표하였다.

 

 

보편교회의 총공의회

 

동서방에서 71명의 총대주교와 관구장 대주교, 412명의 주교, 900명의 수도원장들이 참석한 이 공의회는 명실 공히 가장 큰 ‘총공의회’였다. 1215년 11월 11일에 교황은 주님의 말씀으로 공의회를 개회하였다. “나는 고난을 겪기 전에 여러분과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교황은 70개 장에 이르는 교령안을 제시하고, 공의회 교부들은 세 차례 회의를 거쳐 이를 거의 다 교회법으로 받아들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가톨릭 신앙’은 알비파나 카타리파의 이단설에 반대하는 신앙 규정을 장엄한 신경으로 제시한다. 신경 후반부에서 “보편교회는 하나다. 이 교회 밖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각주 참조)고 하며, 빵과 포도주의 ‘실체 변화’를 명시한다. 제2장에서는 요아킴의 오류를 반박하며 삼위일체 교리를 재확인한다. 제3장 발도파 이단자들에 대한 규정에서는 ‘설교’에 교회법적 파견이 필요하다고 명시하여, 사도좌나 주교에게 미리 허락을 받지 않고 공적이든 사적이든 설교를 하는 자를 파문한다고 하였다. 제4장은 그리스 예법 사제들이 라틴 전례를 경멸하지 못하도록 하고, 제5장에서는 총대주교좌의 서열을 재확인하였다.

 

 

개혁 입법과 십자군 원정

 

제21장에서는 철이 든 모든 신자는 부활절에 영성체를 하여야 하며 적어도 한 해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현행 교회법에서도 그대로 유효하다. 제22장에서는 병자들과 관련하여, 영혼이 육신보다 더 귀중하므로, 육신의 건강을 위하여 환자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의사를 파문하게 하였다. 제51장에서는 비밀 혼인을 금지한다. 제62장에서는 성인들의 유해나 유물을 날조하거나 돈벌이를 위해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63장에서는 성전을 더럽히는 온갖 성직매매나 신성 매매를 단죄하고 있다.

 

어떤 규정에서는 유다인과 무슬림은 성주간에 외출할 수 없고 특별한 표식을 붙인 옷을 입게 하기도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또 프리드리히 2세를 황제로 승인하고, 영국의 ‘대헌장’을 단죄하였으며, 제5차 십자군 원정을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성직자들은 수입의 20분의 1을 3년 동안 전쟁비용으로 내야 했다. 그러나 교황청의 재정 안정을 위하여 모든 교회가 정규 공과금을 내도록 하자는 제안은 부결되었다.

 

인노첸시오 교황이 기대한 대로, 교회가 근본적으로 쇄신된 것은 아니었지만, 지역에 따라, 특히 영국에서는 개혁 입법이 좋은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교황은 이듬해 죽었다. 십자군은 모병에 성공하였지만, 원정은 대실패로 끝나버렸다.

 

 

가난한 가톨릭 신자들

 

복음에서 가난의 이상을 찾아, 재산을 모두 나누어주고 엄격한 청빈생활을 하며, 속죄의 설교에 헌신하던 ‘가난한 사람들’을 발도파라고 한다.

 

그들의 청빈생활이 교황의 축복을 받기는 하였으나, 무허가 설교 때문에 이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았다. 비밀리에 돌아다니던 설교자(바르바)들이 잡혀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교회제도를 부정하고 부유한 성직자들을 비난하여,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를 받았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뒤랑이라는 사람은 도미니코 성인과 만나 토론을 한 뒤 가톨릭으로 돌아왔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가난한 가톨릭 신자들’이라는 탁발수도회의 설립 허가를 받았다. 이 수도회의 규율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상으로 삼은 청빈생활과 거의 같았다.

 

이 탁발수도회는 나중에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와 설교자회(도미니코회)가 대신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회의 작은 형제들과 도미니코회의 설교자들은 ‘교회 권위의 허가를 받아’ 이단자들이 교회로 돌아오도록 회개를 설교하였다. 

 

* 전례력의 표기에 따라 ‘라테란’을 ‘라테라노’로 바로잡는다.

 

*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 성인이 교회 일치를 염원하며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이 교리는 구원론의 최종 결론이 아니라 교회 제도를 부정하는 이단자들에 대한 단죄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헌장’ 14항에서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의 품 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공의회 문헌은 여러 곳에서 “자기 탓 없이”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또 이루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2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52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