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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서양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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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3 ㅣ No.154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조선시대 사람들의 서양 인식

 

 

17세기 이래 중국에 서양문화가 소개되기 시작했고, 조선 사람들도 중국을 통해 이를 만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조선인의 서양에 대한 이해가 구체적으로 심화되었다. 그 계기는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게 된 ‘서세동점’(西勢東漸)이었다. 조선인들도 17세기와 18세기를 살면서 이를 소극적으로나마 체험하고 있었다. 이 체험은 우리나라에 천주교 신앙이 자발적으로 수용되는 중요한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조선에 전해진 서양의 문물

 

17세기 이래 중국에서는 청대(淸代) 문화와 서양 구라파(歐羅巴) 문화가 융합된 청구문화(淸歐文化)라는 새로운 문화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중국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들은 당시 국제외교의 중심지인 베이징에서 서양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서양인과의 만남 또는 청구문화에 대한 이색적 체험을 글로 남겼다.

 

조선 사신 중에 서양 문물을 처음으로 가져온 이는 이광정(1552-1627년)이다. 그는 1603년(선조 36년) 인목대비가 책봉된 사실을 중국에 알리려고 베이징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서 간행된 ‘유럽지도’[歐羅巴國輿地圖]를 가져와서 유럽에 관한 지리적 인식을 조선에 구체적으로 심어주었다.

 

또한 인조 때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던 정두원은 1630년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는 뱃길을 통해 베이징으로 가는 도중 중국 샨퉁[山東]반도 떵조우[登州]에서 로드리게스(Johanes Rodriguez, 陸若漢, 1559-1633년) 신부를 만나 천문도(天文圖)와 ‘세계지도’, “직방외기”(職方外記)와 같은 책자를 받아왔다. 이로써 그는 서양의 천문학과 지리학 지식을 조선에 전파하고, 망원경과 시계, 대포[紅夷砲] 등과 같은 서양 물건들을 도입하여 조선에 소개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 대륙은 명에서 청나라로 교체되었다. 조선도 중국 정세의 변동에 일정한 영향을 받고, 병자호란(1736년)을 통해 중국과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게 된다. 조선이 병자호란 때에 청국에 참패한 이후 소현세자(1612-1645년)는 만주의 심양에서 인질로 생활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청의 조정을 따라 베이징으로 옮겨가 1644년 9월 이후 70여 일간 그곳에 머물렀고, 베이징의 천문대를 찾아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를 만났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에게 천문과 수학 책자, 지구본 등과 같은 새로운 과학기술 자료와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전해주었다.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그의 노력은 소현세자가 귀국하여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수포로 돌아갔다.

 

 

조선 사람들이 만난 서양 사람들

 

18세기에 접어들어 조선 사신과 서양인의 접촉은 좀 더 빈번해졌고 서양에 대한 이해도 심화되어 갔다. 18세기 서양인과 접촉했던 기록은 이이명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1720년 숙종 임금의 죽음을 중국 정부에 통고하려고 파견되어, 베이징에서 남당(南堂) 성당에서 쾨글러(Ignatius Kogler, 戴進賢) 신부와 수아레즈(Joshep Suarez, 蘇霖) 신부를 만나 서양의 천문역법과 천주교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 선교사들은 조선 사신의 숙소를 답방한 바 있다.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이이명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사상에 관한 지식을 조선에 소개했다.

 

18세기 이래 조선인은 북경에서 러시아인들과도 만나, 러시아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베이징의 회동관(會同館=玉河館)은 조선과 러시아 사신의 전용 숙소였다. 경종이 즉위한 직후 1720년 도승지를 역임했던 이의현(李宜顯, 1669-1745년)은 동지사행의 정사(正使)로 베이징에 파견된 뒤 ‘코 큰 오랑캐’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는 러시아의 전권대사로 베이징에 파견되었던 이즈마일로프(Izmailov) 일행에 대해 기록한 것이었다.

 

1721년 3월에 서울을 출발한 사은사 조태채(1660-1722년) 일행은 베이징 주재 러시아 영사 랑게(Lange)를 만났다. 같은 해 10월 서울을 출발한 동지사 이건명(1663-1722년)의 수행원들도 회동관에 머물고 있던 랑게 일행을 만났다. 그 뒤에도 러시아인과 조선인의 만남은 계속되었는데, 특히 1741년 1월 동지사로 파견되었던 낙풍군(洛豊君) 일행은 러시아 정교회가 중국에 파견한 제3차 선교단(1736-1745년)을 만났다.

 

18세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실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18세기 중엽의 실학자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는 홍대용(1731-1783년)과 박지원(1737-1805년)이 있다. 홍대용은 사신의 일행으로 1766년 베이징을 방문하여 천문대장[欽天監正]이었던 할러쉬타인(A. Halerstein, 劉松齡)과 부(副)천문대장 고가이슬(A. Gogeisl, 鮑友管) 신부를 만났다. 베이징 여행은 그의 실학사상에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홍대용은 베이징의 남당을 방문하여 할러쉬타인 신부의 안내로 성당을 돌아보았다. 그는 파이프오르간을 비롯한 서양 문물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고, 남당을 다시 방문하여 고가이슬 신부와 천주교에 대한 필담을 주고받았다. 고가이슬 신부는 천주교의 천주는 원초유학에서 말하는 상제와 동일한 분으로 ‘모든 존재의 으뜸’임을 밝혀 말했다. 그리고 “천주교는 사람을 사랑함을 가르치는데 …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와 같이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홍대용은 고가이슬 신부와 천문학과 수학에 관해서 의견을 나누었고, 망원경 관측법을 배웠다. 또한 동당(東堂) 성당도 방문하여 중국인 왕연산(王連山)의 안내로 성당 안팎을 둘러보고 서양의 문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내었다. 홍대용을 안내했던 왕연산은 스스로 조선 사람의 후손이라 말하고 있다. 그 뒤 홍대용은 다시 할러쉬타인 신부를 찾아서 서양의 천문학 관계 서적을 볼 수 있었고, 나침반이나 시계와 같은 서양의 기구에도 큰 흥미를 나타내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창설되기 전 베이징에서 천주당을 방문한 사람으로는 박지원도 있다. 그는 1780년 베이징의 남당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에서 그는 “천주교 선교사들은 역서(曆書)를 잘 만들고, 서양의 방식대로 집을 지어 산다. … 천주교의 학술은 정성과 믿음[誠信]을 중요하게 여기며, 상제를 밝혀 섬기는 것을 근본 교리로 삼는다.”고 했다. 동시에 “천주교 교리가 지나치게 높고 교묘하여 … 스스로 인륜을 해치게 하는 데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기도 했다.

 

 

남은 말

 

조선은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 해안에 표착한 서양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조선에 전하는 데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그러므로 18세기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의 만남은 우리나라 사상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조선인들은 선교사들을 통해서 서양학술의 정교함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서학’(西學)으로 부르는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된 사건은 18세기 조선인이 자신의 사유를 풍요롭게 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열린 마음은 조선에 천주교를 세울 수 있는 외적인 조건을 형성하였다. 이 외적 조건에 힘입어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직접 선교를 거치지 않고서도 조선인들의 자발적 노력의 결과로 1784년에 창설될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교회 창설의 배경으로 서양인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보여주었던 꾸준한 노력들을 함께 주목해야 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2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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