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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 - 거룩한 교부들의 전통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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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3 ㅣ No.153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3차 라테란 공의회 - 거룩한 교부들의 전통에 따라

 

 

분열과 혼란은 지속되고

 

교회가 진정한 개혁과 정화를 추구하여, 이른바 서임권 투쟁에서 세속 권력을 배제하고,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의 영적인 권위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제2차 라테란 공의회는 대립교황으로 일어난 분열과 혼란을 수습하였다. 그럼에도 세속 권력의 개입과 거기에 따른 대립교황들이 거듭 생겨났다.

 

교황 상서원장으로서 독립심이 강했던 반디넬리 추기경은 독일 군주들이 모인 브장송 의회에서 “황제의 직위는 교황이 주는 은전”이라고 선언하여, 붉은 수염(바르바로사)이라 불린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독일 군주들의 분노를 샀다.

 

황제가 교황권을 장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죽은 뒤에 바로 그 반디넬리 추기경이 교황(알렉산데르 3세)으로 선출되었다. 황제는 즉시 자기 편 추기경을 교황 빅토리우스 4세로 내세웠다. 황제의 권력이 교회 문제에 다시 개입하고, 교회는 또 분열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그 뒤 17년 동안 파란만장한 투쟁을 계속한 끝에 레냐노 전투에서 승리하여, 1177년 베네치아 강화조약을 맺고, 오만한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교황권을 드높인 알렉산데르 3세는 교회 분열을 치유하고자 ‘거룩한 교부들의 전통에 따라’ 제3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교회 개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이 공의회에는 그리스도교 세계 각지에서 온 300여 명의 주교를 비롯해 수도원장들은 물론 황제와 거의 모든 제후가 참석하였다. 1179년 3월 5일, 14일과 19일에 교황이 직접 주재한 공의회는 대립교황들에 따른 교회 분열을 마감하고 성직자들의 기강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남부 지방에 유포된 이른바 ‘순수파’(Cathari)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공의회에서는 27장의 규정들을 결의하였는데, 교회 개혁을 끊임없이 추진하고자했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미래의 분열을 방지하고자, 교황 선거권은 추기경들만 가지되, 교황은 반드시 추기경단 3분의 2 이상의 지지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서자나 30세 미만의 주교서품을 금지하였다. 주교좌성당에는 가난한 학생들과 성직자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두게 하였다. 또한 성직자가 성사집전이나 장례식이나 축복식을 하고 돈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 성전기사단 등에 교회법 준수를 촉구하고, 사라센에게 선박이나 무기자재, 곧 철이나 목재를 공급하는 자를 파문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27장에서는 세속 군주들을 이단 억제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이단자들을 진압하는 군대는 십자군처럼 보호를 받게 되었다. 카타리파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된 것이다.

 

 

순수도 지나치면 죄악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운동의 여파로, 유럽의 평신도들 사이에서는 일상의 삶에서 참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부유한 교회의 봉건체제에 대한 반동으로 여러 곳에서 생겨난 청빈운동들이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여러 갈래의 수도생활로 발전하기도 하고, 기존 수도회에 합쳐져 재속 3회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11세기 들어 프랑스에 순수한 신앙생활을 지향하겠다는 ‘좋은 사람들’이 나타나 13세기까지 번창하였다. 이 타락한 물질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여러 번의 환생을 거쳐야 한다면서, 고행과 극기의 생활을 하였다. 순수의 도가 지나쳐 그들은 교회 모든 것을 부정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순수파(알비파)’라는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이 운동은 비잔틴 제국과 동유럽에서 일어난 바오로파 교회와 마니교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적인 영지주의에 젖어있었다.

 

지역과 사상에 따라 여러 분파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가톨릭교회의 교계를 부정하여, 사제들 대신에 그저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신자 공동체를 이끌어 나갔다. 자기네만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며, 가톨릭교회는 사탄의 집회이고 성직자는 위선자들이고 성경은 악마의 장난이라고 비난하였다. 황제나 군주도 사탄의 협조자들이라고 욕하며 세속 국가의 통치체제도 거부하였다.

 

이단자들이 서구사회의 정치적 종교적 기반을 뒤흔들었기 때문에, 교회는 그 이단 억제에 국가 권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공의회에서 촉구한 것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이단자들의 그러한 주장은 힘없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아들어, 좀처럼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그래서 국가 법정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는 한편, 이단을 진압하는 사람에게는 그 지역을 영지로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그제야 세속 군주들이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이단자들을 향한 십자군 원정

 

교황사절이 살해된 다음에는 대대적인 십자군 원정에 나서, 20년 동안 잔인한 살육 전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이를 ‘알비 십자군 전쟁’이라고도 한다. 처음에 주민이 15,000명이었던 베지에라는 고을에 이른바 십자군이 들어가 닥치는 대로 주민을 학살하고 불을 지른 다음에, 교황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오늘, 성하, 남녀노소 불문하고, 이단자 2만 명이 칼에 쓰러졌습니다.” 이 처참한 전쟁은 1229년에 파리 조약으로 정리되었으나, 이단이 근절되지는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 보두아(발도)는 복음에서 가난의 이상을 찾아, 가진 재산을 모두 나누어주고 엄격하게 청빈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속죄의 설교에 헌신하였다. 그를 따르던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성경도 번역하였다. 그들은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나타나 성경 번역을 제출하며, 평신도의 설교 허가를 요청하였다. 공의회는 이 요청을 거부하였으나 교황은 그들의 청빈생활을 ‘복된 삶’이라고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의회에서 거부된 설교를 계속하며 차츰 교계에서 멀어져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부유한 교회를 비난하고 재산을 죄악으로 여기던 그들의 청빈운동은 카타리파만큼이나 위험한 이단이 되어 지하로 스며들었다. 그 무렵 우리의 가난한 성인 프란치스코가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경향잡지, 2008년 1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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