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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선교 노력 - 조선 땅을 밟고자 했던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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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3 ㅣ No.152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선교 노력

 

조선 땅을 밟고자 했던 선교사들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의 배경

 

교회는 창설 초기부터 선교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를 ‘이교도의 개종’, ‘신앙의 전파’ 등과 같은 말로 사용해 왔다. 이러한 선교개념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나고 아시아에 대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때는 15세기 ‘지리상의 발견’ 이후의 일이다.

 

특히 16세기 종교개혁을 겪은 직후 예수회의 설립(1540년)과 교황청 포교성(布敎省)의 설치(1622년)는 선교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전통적 수도회였던 아우구스티노회,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와 더불어 예수회, 파리외방선교회(1658년 설립) 등이 16세기 아시아 선교의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한편 ‘지리상의 발견’이란 역사적 사건의 영향은 16세기 이래 조선에까지 이르러 조선에서도 서양인과 접촉을 하게 되었다. 조선에 상륙한 서양인에 관한 첫 언급으로는 1582년 마리이(馬里伊)라는 인물이있다. 그는 제주도에 표착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곧 중국 명나라로 송환되었다.

 

1604년 남해안에 스페인 출신의 멘데스(Juan Mendes)가 표착하기도 하였다. 1627년에는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주도하던 네덜란드 상인인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1654년에는 하멜(Hendrik Hamel) 일행이 제주도 남해안에 표착했다. 이처럼 조선에 천주교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서양의 뱃사람들이 조선에 이르고 있었다. 이는 서양인 선교사들도 조선에 다가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동안 동양에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선에도 이를 전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먼저 1576년 1월 마카오 교구에 내린 교황의 대칙서(bula)에서는 교구의 관할 구역을 ‘중국 일본과 인접 지역’으로 규정하여 막연하게나마 조선이 그 관할 지역 안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스페인 선교사인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가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온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조선 입국은 조선인에 대한 선교와는 무관하게 진행된 일이었다.

 

그 뒤 1659년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을 중국의 난징[南京] 대목구에 부속시키고 이 지역에 대한 선교를 위임했다. 그리고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1679년 중국 출신 도미니코 수도회 선교사인 로페즈(Gregorio Lopez) 신부를 ‘남경과 조선 및 인근 성’의 주교로 임명한 바 있다.

 

또한 1690년 교황청이 남경대목구에서 북경대목구를 독립시키면서 조선 선교의 책임은 북경대목구의 관할로 넘어갔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처럼 일찍부터 조선 선교를 지향하면서 조선의 선교 관할권에 대한 배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입국노력

 

앞서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입국한 일이 있었지만, 서양인 선교사들 가운데 우리나라 선교에 처음으로 구체적 관심을 드러낸 이는 예수회 선교사 빌렐라르(Gaspar Vilelar)였다. 그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일본에서 선교를 하다가 1571년 조선에 그리스도교를 선교하고자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으로 인해서 가는 길을 방해받아 입국하지 못했다. 그의 조선 입국이 불가능했던 까닭은 당시 전국(戰國) 시대에 처해있던 일본의 국내 사정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일본이나 중국에 도착한 선교사들도 조선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강화시켰다. 중국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공적을 남긴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신부도 1599년 2월 6일 중국의 난징에서 코리아(Coria)에 관해서 짧게 언급하여 조선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간접으로 표현한 바 있었다.

 

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선교는 17세기 초엽에 시도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도미니코 수도회 선교사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곧 도미니코회 선교사로서 스페인의 카스틸(Castil) 지방 출신인 후안(Juan)은 1601년 필리핀에 도착하여 말레이(Malay)어를 익히다가, 조선 포교의 최적임자로 선발되었다. 그가 동지 두 사람과 같이 먼 길을 항해해서 1618년 조선에 도착했지만 상륙을 거부당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17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를 시도해 보고자 했다. 조선 선교를 위한 시도는 명나라 말기 서광계(徐光啓)와 삼비아시(Francois Sambiasi, 畢方濟) 신부가 추진하였다. 서광계는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자신이 조선에 병력파견을 요청하는 사신이 되어, 삼비아시 신부를 대동하고 조선에 들어가 선교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 자체가 좌절되자 선교도 무산되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로서 조선 선교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추진한 인물은 아담 샬(湯若望) 신부였다. 그는 1644년 중국의 베이징에서 조선의 소현세자를 만났고, 이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선교를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샬의 전교 노력은 작은 형제회의 산타 마리아(Antonio Caballero de Santa Maria) 신부를 통해서 계속되었다. 그는 1650년과 1652년 두 차례에 걸쳐서 아담 샬의 권고에 따라서 북경에서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샬은 1651년 10월 20일자로 상하이에 있던 브랑카티(F. Brancati)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산타 마리아 신부가 조선에 대한 전교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음을 말했다.

 

샬은 산타 마리아 신부에게 필요한 모든 공식 서류를 갖추어 주고 조선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며 조선 입국을 주선했지만, 이 노력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에도 샬 신부는 샨뚱[山東] 반도를 통해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고자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도 중국 주재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타진하였다. 곧 1684년에는 프랑스 출신 예수회원 피아밍고(Antoine Thomas Fiamingo)가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조선 입국을 시도했지만 좌절된 사례도 있다.

 

레지스(Regis) 신부를 도와서 중국의 지도를 작성했던 예수회 선교사 프리델(Xavier Fridell, 費隱)은 1712년경에 조선 선교를 준비하고자 ‘조선 지도’를 작성했다. 또한 중국 지도의 제작에 참여하던 자르투(Pierre Jartoux, 杜德美) 신부나 고빌(Antoine Gaubil, 宋君榮) 신부도 조선 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은 말

 

서양인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조선인들과 마주치지 못했다.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은 조선인 자신이 요청했을 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직접 선교를 거치지 않고 조선인 자신들의 자발적 노력의 결과로 1784년에 창설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배경에, 서양인 선교사들이 동양에서 보여준 꾸준한 노력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한문 교리서를 비롯해서 그들이 중국 선교에서 남긴 업적들에 힘입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교회 창설은 선교사들이 남긴 간접적 결과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교회사의 시작을 이해하는 데에 조선 선교를 시도하다가 좌절한 서양인 선교사들을 함께 기억하게 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1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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