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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천주학쟁이들의 공간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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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65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천주학쟁이들의 공간에 대한 생각

 

 

갓난아이에게도 공간에 대한 생각이 있을까? 젖먹이가 알 수 있는 공간은 아마도 어머니의 품이나 자신이 누워있는 방에 불과할 터이다. 나이가 좀 들면 그 공간을 파악하는 능력도 향상되어 집 부근 일대까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공간의 규모는 이처럼 나이에 따라 큰 차이를 드러낸다. 이 차이는 비단 나이뿐 아니라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도 확연히 구별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생각

 

사람은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의 마을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던 당시, 일반 사람들은 고향뿐만 아니라 원님이 다스리고 있는 자신의 고을과 ‘조선 8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 8도’라는 공간인식을 전제로 하여 임금님이 다스리는 ‘조선’이라는 하나의 나라를 인식했다. 그들이 아는 ‘나라’라는 공간은 고향처럼 실감할 수 없는, 일종의 추상적 개념의 하나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보통 사람들은 조선이라는 나라 이외에도 중국과 일본의 존재는 대개 알고 있었다. 전쟁과 문물의 교류 과정에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공간 파악능력은 역사적 경험의 축적 과정에서 그만큼 신장된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일반인보다 많은 수의 나라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천축국(인도)’, ‘대진국(로마)’의 존재를 알기도 했다. 선비들이 알고 있던 나라 곧 지리적 공간의 폭은 일반인보다 훨씬 넓었다.

 

한편, 서세동점 곧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오던 상황에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접촉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와 ‘하멜’ 일행은 난파당해 조선에 표착하여 살았다. 이도 또한 상호 접촉을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해안 곳곳에서 ‘이양선’이 출몰했다. 19세기 중엽에는 프랑스의 군함이 조선을 직접 위협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좋지 않은 기억과 함께 서양 오랑캐의 나라들을 알게 되었다.

 

 

둥근 지구와 여러 나라들에 대한 이해

 

우리 나라에 근대적 지리지식이 전해지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전반기 사회였다. 유럽의 선교사들은 16세기 후반부터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선교의 한 방편으로 천문, 지리, 수학 등과 같은 과학기술을 중국에 전해주었다. 이 같은 학문을 중국에서는 ‘서학(西學)’이라고 했다. 서학에는 천주교 신앙에 관한 부분과 과학기술에 관한 부분이 함께 들어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천문학은 정확한 시간의 측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학문분야로서 ‘제왕의 학’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이 오랑캐가 아니라 ‘제왕의 학’에 달통한 지식인임을 확인받아 중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정당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고 중국인에게 새로운 공간인식을 심기 위하여 지리학에 열중하였다. 서학은 이러한 목적의식 아래 전파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17세기 초 선교사들의 새로운 지리서가 도입되었다. 1631년 정두원(1581-?)은 명나라에서 ‘만국전도’와 ‘직방외기’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간행한 지리서를 가지고 왔다. 이 책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지구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병자호란 후 인질로 가있던 조선의 소현세자(1612-1645년)도 북경에서 아담 샬(1591-1666년) 신부를 만나 서양의 천문지리에 관한 지식을 알게 되었다. 한편, 홍대용(1731-1783년)과 같은 실학자도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서학에서의 지리학은 세계지리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나갈 수 있었던 계기를 우리 지식계에 제공하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공간인식을 가능케 해주었다.

 

그러나 18세기나 19세기 우리 나라의 보통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며 평평하다.’는 천원지방설을 여전히 믿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천주학쟁이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공간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매일같이 신공을 바쳤고, 자주 교리를 공부했으며, 묵상서를 통해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해 나갔다. 이때의 천주교 서적에는 일반인들이 모르던 여러 나라들과 그 나라의 특이한 풍습이나 사고방법들이 언급되어 있었다. 신자들은 교리학습과 기도를 통해서 새로운 지리지식들을 학습했다.

 

박해시대 천주학쟁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난 유대아라는 나라를 비롯한 그 밖의 서양 나라들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대(大) 데레사 성녀의 전기를 통해서 스페인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교황이 계시는 로마를 알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뒤 그들은 프랑스라는 나라의 존재를 매우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에는 서세동점의 과정에서 조선인들도 서양의 몇몇 나라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학쟁이들의 서양의 나라와 서양인의 풍습, 사고방식에 대한 정보의 양은 일반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히 많았다.

 

 

남은 말

 

지리지식의 확대는 공간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기존의 관념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중국중심설의 포기는 중국과 인연이 있는 사고방식의 상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의 신자들은 유교나 불교와 같은 전통적 신앙들을 상대화하고 천주교라는 이질적 학문을 올바른 가르침으로 믿고 따를 수 있었다.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실천한 이면에는 중국중심의 사고방법에 대한 거부가 도사리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이 구체적 사실에 대한 지식을 통해 자신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강화시켰다.

 

또한,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확대된 세계인식은 문화에 대한 가치평가에서도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주었다. 종전에는 중국에서 발생한 유교나 그 밖의 사상만이 정통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조선과는 다른 외국이라는 관념이 약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천주교 신자들은 중국이 외국임을 분명히 지적했고, 천주교 신앙을 외국의 것이라 하여 무조건 배격하는 태도가 옳지 않음을 말했다. 19세기 중엽 천주교 신자들이 지어 부른 ‘천주가사’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나온다.

 

“다행하다 우리 교우, 조물(造物)진주(眞主) 얻었구나 … 어찌하여 이런 도가 참된 줄을 모르는고. 그르다고 훼방하고 외국 도(道)라 배척하면, 외국 문자 어찌 쓰노, 의례(儀禮) 복서(卜筮) 노불도(老佛道)도 동국(東國)법이 아니로다. 원근지방 의론 말고 옳으면은 쫓느니라.” 우리는 이 천주가사에서 확대된 공간인식이 새로운 도리에 대한 깨달음과 문화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경향잡지, 2002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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