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선교사들의 우리말 익히기 - 중국어보다 어려운 한국어 공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1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선교사들의 우리말 익히기

 

중국어보다 어려운 한국어 공부

 

 

교회에서는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영혼의 존재를 들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사람을 짐승과 구별하는 가장 큰 요소로 말을 꼽고 있다. 물론 일부 짐승들도 서로의 의사를 소통하는 말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지식을 전해서 축적해 주는 사람의 말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람은 말로 지식을 전해주고, 말을 사용하여 생산활동을 원활히 하게 된다. 진리를 선포하는 일도 말을 떠나서는 할 수 없다. 말은 이처럼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그리고 쌓아온 지식을 음성이나 문자로 전달해준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은 음성을 통해서 전달되는 입말과 문자를 통해서 표현되는 글말로 나뉜다. 그런데 같은 말을 하는 사람끼리는 자연스럽게 이를 배우게 되지만, 외국인이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말을 배우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교회를 위해 들어왔던 선교사들도 우리와는 말이 다른 외국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말과 문화를 익힘으로써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어 우리 역사를 일구어왔다.

 

 

주문모 신부의 우리말 익히기

 

오늘날 우리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에 단 한 권의 사전도 문법책도 없었던 경우를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땅에 복음을 전하고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은 바로 이러한 경우에 직면해야 했다. 선교사들 대부분은 단 한 권의 참고서적도 없이 조선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조선의 말과 글자를 한마디씩 익혀나가야 했다. 그들의 우리말 익히기는 이처럼 무모하게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교회를 처음 찾았던 선교사로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들 수 있다. 주문모는 무엇보다도 서양인 선교사들과는 달리 한문에 능통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한문이라는 글말을 통해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문모와 조선의 지도적 신도들 사이에는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한문이라는 글말이 있었다. 그러나 주문모는 조선에 입국한 이후 필담이 아니라 직접 입말을 통해서 ‘예수교’의 진리를 전파하고자 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던 18세기 말엽 우리나라에는 “노걸대(老乞大)” 또는 “박통사(朴通事)”와 같은 중국어 학습 서적이 있었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여 최인길, 최창현 등 역관층과 접촉하고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우리말을 배울 때에 아마도 역관 교육과정에서 사용하던 이러한 책들을 볼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1795년 초에 입국한 뒤 3-4개월 동안 조선말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가 중국어 학습서적을 역으로 이용하여 조선어를 배웠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이 책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어 학습교재가 아니라 중국어 학습교재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책을 통해 조선어를 공부하기보다는 직접 현장을 뛰면서 조선어를 학습하는 방법을 택했던 듯하다.

 

그는 입국한 이후 몇 개월이 안 되어 맞이하게 된 부활축일 직전 성목요일에 어른들에게 ‘글로 써서 하는’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그는 마침내 부활절에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미사성제를 드리고 고해성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체를 분배했다.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가 조선신자들에게 직접 체득되던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미사전례에 라틴어만이 사용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전례용어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입말로 조선인 신자들을 가르치며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어 공부에 전념하면서 글말인 조선의 한글도 배웠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조선말 실력에는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그를 만났던 조선인 가운데에는 그가 ‘반벙어리’처럼 말했다고 증언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짧은 조선말을 가지고 조선 땅에 구원을 선포한다는 큰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말 공부

 

조선교회는 원래 북경교구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1831년 조선교구의 설정을 허가하고 그 선교를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했다. 이로서 조선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36년 초에는 모방 신부가 입국했고 그해 말에 모방 신부의 연락을 받은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게 되었다. 그리고 1837년 초에는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여 조선교회는 명실상부한 교구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입국했던 프랑스 선교사들 가운데 앵베르 주교는 중국의 쓰촨 지방에서 17년간 선교에 종사하면서 중국말에 능통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방 신부도 조선입국을 시도하면서 1년간 내몽고의 시만즈에 머무는 동안 한문공부를 하였다. 샤스탕 신부도 샨퉁 지방에서 2년간 중국인 신도들을 돌보면서 중국말을 익혔다. 그들의 중국말 학습은 조선말 가운데 한자어를 익히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으리라 판단된다.

 

조선에 입국한 직후, “모방 신부는 조선말 공부에는 시간을 별로 할애할 수 없었다. 신자들이 성사받기를 하도 서두르고 여러 가지 중요한 점을 하도 배우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신부는 숨을 돌릴 겨를이 없을 지경이었다. 모방 신부는 동료가 도착하자 서울 부근 양근(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으로 가서 얼마 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는 거기서 4주 동안 말공부를 한 다음 그 읍내 신자들을 보살폈다. 샤스탕 신부는 서울에 와서 어떤 회장 집에 머무르면서 조선말을 배웠다. 그는 2개월간 성찰규식을 외우는 데 힘썼고, 그런 다음 조선말로 백 명 가량의 고해를 받는 것으로 첫 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다.” 한편, 앵베르 주교는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후 고해를 들을 수 있었다. 3백 명 이상의 신자가 부활축일 준비로 그에게 고해성사를 받고 그의 손으로 성체를 영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처럼 단기간에 조선말을 배우고 선교현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인 신자들이 성사생활을 갈망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정도로 짧은 기간에 배운 조선말이 얼마나 조선인들에게 통했을지 의심된다. 물론 당시 교회에서는 말씀 선포보다는 전례 집전이 월등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감안하자면 그들은 조선에 도착한 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가톨릭 선교사로서 훌륭한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칼레 선부는 조선말을 잘 하는 동료 선교사로 프티니콜라 신부를 지목한 바 있지만 조선말을 가장 잘한 선교사는 아마도 다블뤼 주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는 자신이 직접 조선말로 된 책자들을 감수하거나 저술했다. 그는 후배 선교사들을 위해서 조선말을 연구하여 조선말과 그 해당 한자어를 프랑스말로 옮겨놓은 사전을 편찬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말 실력은 조선에서의 활동기간이나 그에 대한 애정에 비례하면서 쑥쑥 늘어가고 있었다.

 

 

남은 말

 

다른 나라 말을 배우는 일은 그 나라의 문화나 사회와 함께 호흡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어가 매우 어려운 말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특히 조선어 문법서를 지었으며 조선어와 중국어의 체계를 비교한 칼레 신부는 “조선어는 매우 어렵고, 익히는 데에는 중국어보다 더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조선의 글자인 한글에 대해서 그 효용성과 간편성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어려우나 편리한 조선말과 글을 배움으로써 박해받던 신도들과 하나가 되어갔다.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 가운데는 입말이나 글말을 미처 배우기도 전에 병마에 희생된 사람도 있었고, 관원에게 잡혀서 순교의 길을 걷기도 했다. 미지의 땅이었던 조선에 대한 선교 열의는 죽음의 공포까지도 극복시켜 주었다. 그들은 복음을 이땅에 강생시키려고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



파일첨부

48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