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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순교자의 자식 사랑 - 자식 사랑을 밟고 간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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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12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순교자의 자식 사랑

 

자식 사랑을 밟고 간 순교자들

 

 

순교는 인간의 정리를 끊고 하느님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행동이다. 인간에게 가장 강인한 감정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생각, 특히 어린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모성애일 터이다. 우리나라 순교자들이 끊어야 할 인간의 정리 가운데에는 바로 이러한 자식에 대한 사랑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식 생각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사에서는 자식 때문에 배교해야 했던 어머니들을 볼 수 있으며, 자식과의 생이별을 강요당했던 어버이들, 순교 때문에 부모와 사별하게 된 자식들도 적지 않았다.

 

 

어린 자식을 노비로 남긴 어머니의 사랑

 

박해시대 천주학을 신앙하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하고 가정의 풍비박산까지도 각오해야 했던 중대한 결단이었다. 부모의 순교는 그 자식들에게 떠돌이 고아가 되어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야 함을 뜻했다. 1801년의 박해에서도 이 같은 가족의 해체 현상이 황사영의 가족에게서 잘 나타난다.

 

황사영이 백서 사건으로 인해 대역부도죄로 죽음을 당한 다음, 그 가족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의 관비로, 그의 처 정명련은 제주도의 관비로 보내졌다. 당시 지방 관아로 보내진 관비는 창녀처럼 지내야했다. 그리고 황사영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의 관노가 되었다. 만일 황경한이 그때 나이가 좀 더 많았다면, 아버지 황사영의 죄에 연좌되어 처형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어려 처형을 면하고 추자도의 관노로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 교회에는 하나의 전설이 만들어졌다. 곧, 황사영의 처와 아들은 전남 강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었다한다. 물론 황경한은 나이가 차면 제주도에서 죽을 운명이었다고 이 전설에서는 묘사한다. 아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어머니 정명련은 유배를 가던 도중에 뱃사공을 매수하여 추자도 바위 위에 어린 아들을 내려놓고 홀로 떠났다 한다. 그 아들은 착한 섬사람에게 거두어져 살아났다는 것이 전설의 줄거리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황경한은 애초부터 추자도에 유배형을 받았다. 이 애절한 전설은 정명련의 마음을 읽어낸 후대의 신자들이 만든 이야기였다. 그 모자를 기억하는 후대의 사람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벌거숭이 어린 아들과 떨어지던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이렇게 읽어내고자 했다.

 

 

자식을 성숙시킨 부모의 사랑

 

1839년 전라도 전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옥에 갇혀있던 5명의 신자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정태봉 바오로는 자기가 심약한 것이 안심이 되지 않아 그날 아내와 아이들을 오지 못하게 하여달라고 옥졸들에게 청하였다. 그들이 처형장소로 가는 동안 이일언 욥의 아이들이 울며 아버지를 따라오니 이일언은 그들에게 기쁜 말투로 말하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옥중에서 신음했는데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간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내 행운을 기뻐하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언제까지나 훌륭한 교우가 되어라.”

 

그들 5명은 장마당에 모여든 많은 군중 가운데에서 모두 참수를 당하였다. 그들에게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는 일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초대교회 교리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우리의 순교자들이 자식을 위로한 말에서 이러한 짐작을 하게 된다.

 

 

부모를 감동시킨 자식의 사랑

 

1839년의 박해는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탄생시켰다. 그러나 최경환의 부인이며,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는 순교자였음에도 아직 복자위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 마리아에게는 신부가 되고자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 큰 자제 외에도 12세 된 야고보와 9세, 7세, 5세 된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부모들이 옥에 갇힌 뒤, 야고보는 소년가장이 되어 옥바라지를 하며 어린 동생들도 지켜야 했다. 이 가련한 정경이 눈에 어린 이 마리아는 한때 자식 생각 때문에 배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옥중에 있던 다른 여교우들의 권면으로 배교를 철회하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 마리아는 순교를 앞두고 감옥을 찾은 야고보의 머리를 빗겨주며 이르되,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각별히 사랑으로 보호하여 친애하며, 아무 곳, 아무 곳에 각각 데려다 두고 아직 어떻게든지 지내노라면, 중국 마카오에 가 있는 너의 형이 나오면 자연히 안배하리라. 아무 날은 내가 치명하는 날이라. 그날은 오지 말도록 하여라. 만일 내가 너를 보면 미진한 육정에 유감이 들까 하노니 오지 마라.” 하며 어서 가기를 재촉했다. 열두 살짜리 아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마지막 길을 떠나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야고보의 어린 가슴은 무너지는 듯 막히고, 눈물은 앞을 가려 지척을 분별할 수 없더라. 시름없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전전푼푼을 구걸하여 모았다. 야고보는 옥사장이를 찾아가 모친 치명하신다는 당일에 형을 집행할 희광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어 그를 찾아가 구걸한 돈냥을 주며 부탁했다. “모습이 이러이러한 죄수는 우리 모친이시니, 칼을 잘 갈아 형을 집행하되, 각별히 조심하여 주시오.” 야고보는 날이 선 칼로 어머니의 목을 단번에 쳐주어 고통을 줄여주기를 겨우 바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그는 행여 어머니의 눈에 뛸세라 먼발치에서 순교의 길을 쫓아갔다. 어머니가 처형되던 광경을 바라보고 돌아온 야고보에게 어린 동생들은 “어머니가 언제 나오시냐?”고 물었다.

 

 

남은 말

 

박해는 순교자를 탄생시켜 성인의 숫자를 늘려주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누르고 순교의 길을 택한 장한 어버이들이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또한 박해는 가정을 파괴했고, 어머니를 배교자로 만들기도 했다. 박해는 어버이를 잃은 어린이들을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을 더욱 슬프게 했다.

 

박해 때에 그 힘든 일을 끌어안았던 이땅의 어머니들은 성모 마리아의 진정한 모상이었다. 자식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접어야했던 어머니들도 또 다른 성모요 마리아였다. 이 성모 마리아님들의 고뇌 안에서 우리 교회는 성숙되어 갔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참되게 살았던 사랑을 따뜻한 가슴으로 맞아야 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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