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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순교자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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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74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순교자의 최후

 

 

해마다 7월이면 김대건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는 축일을 지내게 된다. 김대건 성인은 한국 천주교회가 배출한 대표적 순교자로 각인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증언하려고 의로운 죽음을 당한 조선인 사제였다.

 

흔히 한 삶의 마무리인 죽음의 순간은 평소에 잘살아왔다는 증거가 드러나는 때로 생각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선종하기를 바랐고, 선종의 은혜는 신앙을 잘 실천해 온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선물로 인식해 왔다. 지난날 교회사를 기록한 사람들이 순교자의 최후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도 순교자의 이러한 평소의 성덕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들이 당했던 고통과 죽음의 순간을 장엄하게 묘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순교자의 죽음

 

박해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여러 형태의 순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른바 그릇된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학죄인’을 처벌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일반적 방법으로는 교수형과 참수형이 있고 군문효수형과 사약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법정형 이외에도 여러 방법들이 ‘천주학쟁이’들을 처형하는 데에 적용되었다. 1868년 해미에서 있었던 생매장은 법외형이었다. 얼굴에 창호지를 겹겹이 붙이고 물을 뿌려 질식사시키는 방법도 신자들에게 적용된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한겨울에 신자들을 동사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이 법외형들은 인간의 잔인함을 한껏 드러내주는 사례들이었다. 또한 교회의 전통에서는 고문치사를 당한 이들도 순교자라 인정해 왔다. 그리고 옥중에서 고문의 후유증이나 굶주림으로 죽은 이들도 순교자로 불렀다.

 

‘사학죄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집행되었다. 우리 교회사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은 사람들로는 앵베르 범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그리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이다. 칼레 신부는 군문효수의 광경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새남터에서의 군문효수

 

“새남터는 강가에서 한 10분쯤 거리에 있는 커다란 모래사장이었다. 모래사장의 한 귀퉁이에 형이 집행되는 동안 천막이 하나 쳐졌다. 천막 안에는 사형 집행의 책임을 맡은 장교가 앉을 의자가 놓여있다. 백사장 가운데는 장대 하나가 서있고, 그 꼭대기에는 흰 기를 감아올렸다. 사형수를 호송한 병정 4백 명이 많은 호위병을 거느린 장교의 천막 앞에 반원형으로 늘어섰다. 병정들은 두서너 발자국 앞에서 군중들을 제지하고 있고, 그들 앞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임석장교의 천막 앞에 말발굽 형태로 열을 지어있다.

 

그들 앞으로 붉은 색 군기를 든 군인들이 오고, 이 사람을 포함한 다섯 명의 군졸들은 고문도구를 들고 있다. 그리고 나서 날이 긴 칼을 들고 망나니 여섯 명이 동그랗게 원을 이루며 들어왔다. 사형수는 그들 가운데 놓여있다.

 

사형수를 큰 장대 밑에 내려놓은 다음 형틀에서 풀고 나서 고의 하나만 남기고 옷을 전부 벗긴다. 양팔을 등에 단단히 묶고, 망나니 하나가 양쪽 귀의 아래 끝을 접어 맞대고 화살로 위에서 아래로 꿰뚫어 꽂아놓았다. 다른 두 망나니는 얼굴과 머리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석회를 뿌렸다. 그런 다음 몽둥이 두 개를 겨드랑 밑으로 꿰어 사형수를 쳐들고 광장을 여덟 바퀴 돌면서 구경꾼에게 보이는데, 그들이 걸어가며 만든 동그라미를 점점 줄여가서 여덟번째 돌았을 때는 터전의 중앙에 와있게 된다.

 

그때에 사형수는 무릎을 꿇고, 고개는 머리채를 잡아당겨 오랏줄로 묶어 한 군인이 이를 잡아당겨 숙이게 했다. 여섯 명의 망나니가 긴 칼을 치켜들고 야만적인 춤을 추면서 무서운 고함을 지르며 쉴새없이 돌면서 자기 멋대로 치고 싶을 때에 칼질을 한다. 몇 번의 칼질에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 모든 병사와 망나니들은 ‘끝났다.’ 하고 일제히 외쳤다.

 

곧 머리를 거두어 관례에 따라 작은 소반에 젓가락과 함께 올려놓아 장교에게 가져가서 사형수의 머리가 틀림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젓가락은 사형집행을 주관하는 군관이 더 자세히 검사하고자 하는 경우에 머리를 집어 뒤적이려고 거기 놓는 것이지만 보통은 쓰지 않았다. 그 다음 머리는 몸뚱이 곁으로 다시 가져다가 높이 네댓 자 되는 기둥의 선고문을 쓴 판자 밑에 머리칼로 매달아 놓는다”(칼레, 「베르뇌 전기」에서).

 

 

남은 말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 사람의 생명은 하늘이 내렸고,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세상에서 번성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사람의 생명에 대한 침해가 국가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나 편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박해시대의 천주학쟁이에게 집행되던 사형도 전근대적 폭력의 하나였다. 이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미화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전통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순교자의 최후 장면에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 물론 이는 죽음을 미화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 드러난 신앙을 선양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순교자를 생각하면서 순교 장면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순교자의 최후가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이 장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실천했던 사랑과 정의를 밝히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이 점은 김대건 신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김대건 성인에게는 7월의 한여름 작열하는 햇빛과 같은 믿음과 사랑이 있었고, 이를 겨레에게 실천하려는 열정이 있던 분이다. 김대건의 진면목은 새남터의 모래사장이 아니라 그가 활동했던 이땅과 바다에 새겨져 있다. 그가 당했던 군문효수형의 처절함이 그가 간직하고 실천했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기쁨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는 순교자의 고통이나 그 죽음에만 관심을 집중시켜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죽음보다는 그들의 삶이 더 절실히 요청된다.

 

[경향잡지, 2003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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