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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7: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 - 온땅에 두루 복음을 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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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3 ㅣ No.198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7)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 - 온땅에 두루 복음을 알려라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공동체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기 시작했고 흩어진 신자들은 이교도 지역에서 용감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성교회가 창립돼 '그리스도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이라 불릴만큼 독립된 종교단체로 주목을 끌었다.

 

이에 사도들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에 파견해 교회를 돌보게했고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머물던 바오로를 초빙하고 이때부터 사도 바오로의 위대한 전도여정이 시작된다.

 

사도 바오로의 위대성은 그의 전도여행에 있고 그 전도여행의 위대함은 구원의 복음이 유태교나 팔레스티나지역의 좁은 곳을 벗어나 전 세상을 위한 보편적 복음이 되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데 있다.

 

바오로는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세번에 걸쳐지중해 동부지역에 광범위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안티오키아는 사회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대도시였다.

 

안티오키아는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제국 안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셋째가는 큰 도시였고 동방과의 무역로인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안티오키아의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바오로 사도가 왜 이곳을 전교의 거점으로 삼았는지 충분히 대변해 주고 있다.

 

안티오키아의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화에 휩싸이는 계기가 되고 이로인해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남긴 유적은 물론 그리스도교 공동체 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만들었고 지금은 이름마저도 안타키아로 바뀐 도시 뒷 언덕에 있는 베드로 석굴성당만이 남아 그나마 멀리서 달려온 순례자들 허탈한 마음을 달래준다.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와 함께 이곳 안티키아를 떠나 키프로스섬으로 가면서 첫번째 전도여행(45~49년경)을 떠나 베르게 비시디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데르베 등지에서 전교활동을 펼쳤는데 이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했다.

 

이방인들의 입교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에게 예수의 신앙만을 요구할 것인가 유대교 율법까지 지키도록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돼 결국 예루살렘에서 사도공의회(49년경)가 열리게 된다.

 

교회 역사상 첫 공식적인 회의인 이 사도회의에서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기로 결의함으로써 바오로는 명실공히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앞으로의 그의 전도여행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첫번째 전도여행의 성공에 고무된 바오로는 곧이어 두번째 전도여행((50~52경)을 떠나는데 특히 고린토에서 18개월간 머물면서 신약성서 중 가장 먼저 쓰여진 데살로니카 전서를 집필했다. 두번째여행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바오로가 유럽에 첫발을 디뎠다는 것이다. 필립비교회가 바로 이 두번째 여행중에 바오로가 유럽(지금의 그리스)에 세운 필립비, 데살로니카 , 베레아, 고린토의 네 교회중 처음으로 세운 교회로 이후 필립비교회는 바오로 사도의 전도와 생계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돕는 유일한 교회가 된다.

 

두번째 전도여행에서 가장 오래머물렀던 고린토에는 52년경 바오로 사도가 갈리오 총독에게 심문을 받은 법정 축대가 보존돼 있어 그 위대한 여행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세번째 전도여행(53~58년경)의 중심지는 3년가까이 머물면서 큰 교회를 세웠던 에페소였다. 바오로 사도는 이 곳에서 많은 위험과 시련 속에서 고통을 당했고 얼마동안 옥고까지 치른 것으로 보여진다.

 

복음전파를 위해 스스로 감내한 사도의 그로한 수난은 신앙의 씨앗이 돼 에페소 교회는 당시 교회들 중 가장 큰 교회가 됐고 이곳을 중심으로 신앙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한다.

 

지금도 에페소의 성요한 대성당 유적을 보면 당시 교회가 얼마나 활발했던지 짐작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의 전도여행지를 찾아 다니면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 전도여행의 성공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것이었고 이를 오늘날에는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빠르고 넓은 전파는 사도 바오로의 열정 이전에 그리스도교가 지니고 있는 진리의 힘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거대한 로마제국의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있었던 희랍 사상아래서 고대인들이 가장 고민했던 신의 문제, 영혼의 불멸, 지상생활의 목적, 정의 등의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교 사상이 주는 명쾌한 해답은 이교적 세계관의 체험 속에서 진리를 찾던 이들에게 구원의 빛줄기가 됐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이교들과의 차이점, 즉 그리스도교의 윤리성, 초월적인 선험적 종교관 , 역사 속에 생동하는 역사성, 이를 증거하는 고대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기적 등은 입교자들에게 참된 새로움을 주기 충분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바오로의 남다른 배경도 그의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한 요인이 됐다.

 

바오로는 첫째 율법을 가르치던 바리사이로서 개종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이 유다교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지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있었다. 둘째 바오로는 디아스포라 유다인으로 넓은 세상에 대한 많은 경험과 더불어 희랍어를 잘 구사했을 뿐 아니라 희랍 사상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바오로의 두가지 장점은 그의 전도여행을 성공으로 이끄는 훌륭한 바탕이 되는데 첫째가 없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대한 예언자가 되지 못했 것이고 둘째가 없이는 이교인을 위한 성공적인 선교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가 가졌던 첫번째의 성공요인인 그리스도교가 가진 진리의 힘은 이미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자로서의 사명인 복음선포를 위해서는 내가 믿는 신앙에 대한 이해와 복음대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복음을 위한 헌신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로 보인다.

 

"나의 기대와 희망은 내가 조금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렇듯이 지금도 온 세상에서 찬양 받는 것입니다"(필립 1, 20)

 

[가톨릭신문, 2001년 1월 14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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