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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1차 바티칸 공의회 - 세속의 권력을 버리고 얻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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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21 ㅣ No.190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제1차 바티칸 공의회 - 세속의 권력을 버리고 얻은 자유

 

 

신앙의 유산을 보호하고자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온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교회는 놀랍게도 똑바로 서있었다. 오랜 수도원들도 사라져버렸다. 황제를 선출하던 제후 교구들도 없어졌다. 교회는 세속의 권력을 거의 다 빼앗기고 몹시 가난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를 찾았다. 그러나 근대 사상의 범람은 더욱 심해져 신앙의 유산을 위협하였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년)는 그러한 시대사상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이른바 ‘오류 목록’(Syllabus)을 발표하였다. 한 세기가 넘도록 교회를 경멸해 온 합리주의를 비롯한 근대 철학 체계와 범신론, 공산주의 등의 사회사상, 혼인 등 그리스도교 윤리에 관련된 오류들을 단죄한 것이다.

 

그것은 근대 문화 전반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여져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신앙의 유산을 보호하겠다는 교황의 결의는 확고하였다. ‘오류 목록’을 발표하기 바로 이틀 전인 1864년 12월 6일, 비오 9세는 ‘비상한 방법’(공의회)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세계 공의회 개최에 대한 추기경들의 의견을 비밀리에 묻고, 주교들의 자문을 구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300년이 더 지나도록 세계 공의회가 열리지 않았으므로, 정치적인 우려 말고는 공의회 개최의 필요성이 넘쳐났다. 그래도 교황은 두 해가 넘도록 심사숙고한 끝에 공의회 소집 계획을 공개하고, 다시 한 해 뒤에 소집 칙서를 발표하여, 1869년 12월 8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제20차 세계 공의회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철저한 준비에 여론도 달아오르고

 

전 세계 774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장엄한 공의회에는 이전과 달리 세속의 군주들이 보이지 않았다. 초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교황은 프로테스탄트와 비가톨릭 신자들을 공의회에 초대하였지만, 그들이 참석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인쇄 출판의 발전으로 세속에서는 그 어느 공의회보다도 더 폭넓은 관심을 보이며 여론이 형성되어 갔다.

 

공의회가 열리기 전부터 교황의 교의적 무류성 등 주요의제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오갔다. 그러나 주교들의 확고한 신앙과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보면, 그 어떤 공의회도 이보다 더 훌륭하고 거룩한 일치에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의회 준비도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추기경들이 주도하는 5개의 준비 소위원회에서, 사상의 오류를 배척하는 가톨릭신앙,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교 혼인 등 3개의 기다란 교의헌장 초안, 교구와 신학교, 전례, 비밀 결사 등 교회 규율에 관한 28개의 교령 초안, 수도회에 관한 18개의 교령 초안, 동방교회와 선교교령 초안을 공의회 교부들에게 제시하고, 전 세계의 주교들은 또 수많은 제안들을 내놓았다.

 

공의회는 네 차례의 공개 회기와 89번의 전체 회의를 가졌다. 먼저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헌장은 이른바 오류 목록에 관련된 초안을 많이 수정하여 제3차 회기에 채택하였다. 이 헌장은 창조주 하느님, 계시, 신앙, 신앙과 이성이라는 4개의 장과 18개 조항의 파문 법규로 이루어져 있다.

 

 

교황은 교좌에서 교리를 정의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

 

공개 회기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전체회의에서 수많은 초안들을 심의하였으나, 어느 것 하나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토록 철저하게 준비한 많은 초안들과 귀중한 자료 더미들은 토론에 부치지도 못하였다. 세속의 흥분과 여론의 분열을 일으킨 교황의 ‘무류성’ 문제가 압도적인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주교들 다수가 교황의 무류성 교의 정의에 찬성하였지만, 소수파에서는 교황만이 아니라 주교들을 포함한 온 교회가 무류성을 지닌다든가 또는 교황의 교의적 무류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선교나 개종에 장애가 되므로 지금 교의로 정의할 것까지는 없다는 등의 논리로 강력한 반대를 하였다.

 

수정 제안은 미리 서면으로 제출하라는 의사 규칙의 개정은 다수파에 유리하였다. 토론의 내용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대립은 숨길 수 없었다. 일반 언론이 찬반 토론에 더 열심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초안은 15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10장은 교회에 관한 일반 교리, 11-12장은 교황의 수위권, 13-15장은 교회와 세속 권력의 관계를 다루었다. 교황 무류성에 관한 부분이 청원에 따라 제11장에 덧붙여졌다.

 

공의회는 4개 장으로 축소된 수정 초안(1-3장 교황의 수위권, 4장 교황의 무류적 교도권)에서 교황의 최고 수위권이 주교들의 권력을 폐지하지 않는다는 데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교황의 무류성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870년 7월 18일 제4차 회기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제일 교의헌장’이 찬성 533표, 반대 2표로 채택되었다. 교황은 즉시 이를 교의로 승인하고 선포하였다. 이 헌장은 교황의 무류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교황이 교좌에서(ex cathedra) 말할 때, 곧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온 교회가 지켜야 할 교리를 정의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신앙규정편람, 3074).

 

 

미완의 공의회

 

다음 날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공의회 교부들이 떠났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남겨 둔 교회론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았다. 공의회는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폐회도 선언되지 않았다. 1960년에 교황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할 때까지.

 

그해 1870년 9월 20일에는 피에몬테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실제로 교황령은 폐지되었다. 교황 비오 9세는 ‘바티칸의 포로’로 자처하고, 세속 권력과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가 오류 목록에서 단죄하였던, “사도좌는 시민 제국(市民 帝國 : 敎皇領)의 폐지로 교회의 자유와 행복을 최대로 얻을 것이다.”(신앙규정편람, 2976)라는 주장이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교황령을 빼앗기고 세속의 권력을 버린 다음에야, 가톨릭 교회는 전 세계에 더욱더 강력한 정신적인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의 교의적 무류성에 강력히 반대하던 일부 인사들이 이른바 ‘구교’(舊敎)로 자처하며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이 미완의 공의회가 남긴 공로로, 교황 레오 13세는 전 세계에 강력한 교도권을 행사하며 온갖 사회 문제에 교회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권위와 자유를 누렸다. 가톨릭 교회의 사회교리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 다음에 교황이 된 비오 10세 성인은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새로운 교회법전의 편찬에 착수하고, 성무일도를 개정하는 등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가능케 한 전례 운동의 토대를 놓았다.

 

 

공의회의 주제는 언제나 개혁이었습니다. 이제 공의회에 관한 두서없는 이야기를 마칩니다. 사학의 방법론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 어림잡아 교회사의 중요한 가닥을 찾으려니 힘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기록된 문서들의 소제목을 달아가려는 마음이었으나, 그래도 재미는 있어야 한다는 부당한 논리에 휘둘려, 열심한 신자 여러분의 신앙심에 누를 끼치는 불손한 언사들이 튀어나왔음에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합니다(필자주).

 

이로써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는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집필해 주신 필자와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강대인 라이문도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번역실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12월호, 강대인 라이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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