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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 천주교와 불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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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24 ㅣ No.189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 천주교와 불교의 관계

 

 

새로운 신앙이 전파될 때에는 그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기성의 신앙과 관계를 갖게 마련이다. 17세기 중국에서 선교한 마테오 리치 신부는 중국의 기성 종교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한 결과, 유교는 그리스도교로 보완하여 그 이론을 완성시켜 주고, 불교는 철저히 배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천당과 지옥에 관한 천주교의 설명 등을 불교와 흡사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해시대 우리나라 신자들은 불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천주교의 특성을 드러내야 했다.

 

 

불교와 천주교의 관계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한문으로 된 서학서적을 검토하던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천주교가 불교의 한 종파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이러한 단정은 박해시대에도 이어졌다. 1801년에 내린 이승훈의 사형 판결문에 보면, “천주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은 불교를 잘못 모방한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또한 1801년 당시 천주교 박해를 일단 마무리 지으며 반포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에서도 천주교 신앙은 “불교의 찌꺼기를 주워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사에서 불교에 대해 논리적 비판을 시도한 사람으로는 정약종을 들 수 있다. 그는 한글로 “주교요지” 상?하 2권을 지었다. 정약종은 상권 32개 항목 가운데 8개 조항에 걸쳐 불교의 교리에 대한 분석과 공격을 시도했다.

 

먼저 그는 불교의 부처와 보살이 모두 다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역설하면서, 부처나 보살은 천주의 무궁한 능력과 무한한 착함에 비하자면 그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강조했고, 석가모니를 섬기는 일은 하느님 앞에서는 반역행위와 마찬가지임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불경의 말은 열에 아홉은 의심할 만한 내용이라고 단정했다.

 

정약종은 불교 윤회설의 문제점을 길게 지적한다.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음을 지적하면서, 윤회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람이 동물로 태어나고 동물이 다시 사람이 된다는 식의 설명은 이치에 맞지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정약종은 천주교의 천당 지옥론에 입각하여 불교의 천당 지옥에 대한 주장이 허망함을 밝히려고 했다. 곧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의 선악에 대한 상과 벌을 주관한다는 태도로 인간인 부처가 다른 사람을 천당이나 지옥으로 보낼 수 없음을 말한다.

 

정약종은 “주교요지”에서 모두 10개 조항에 걸쳐 타종교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중에 8개 조항에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으며, 나머지 조항에서는 도교의 옥황상제에 대한 비판과 잡귀신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는 그가 조선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기존의 종교로 불교를 지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또한 정약종은 천주교가 불교의 한 종파라고 잘못 인식되는 상황을 바로잡고자 “주교요지”를 통해 불교에 대한 본격적 비판을 시도하여 천주교에 대한 이와 같은 그릇된 인식을 바로 잡고자 했다.

 

 

신자들의 불교 인식

 

박해시대 교회사를 검토해 보면 일부 신자들은 천주교에 들어오기 전에 불교와 일정한 접촉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801년에 죽은 김건순 요사팟은 천주교 서적을 읽기 이전에 이미 불경을 읽은 바 있었다. 1830년대 경상도 북부지방에서 신앙을 실천하던 김호연의 경우에도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1839년에 순교한 유진길 성인도 입교 이전에 10년 남짓 불교 서적을 ‘철저히’ 연구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은 불교와 같은 기성 종교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에 호기심을 갖고 접근한 것으로 생각된다.

 

박해시대의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불교에 투신했거나 직접 승려생활을 하다가 퇴속한 사람들도 있었다. 1801년의 순교자 강완숙 골룸바는 젊었을 때 불교에 전념하여 한때는 속세를 떠나 출가할 결심을 하기까지 했었다.

 

다블뤼 신부는 1845년, 자신이 조선에 입국하기 직전에 어느 과수댁이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려고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비구니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불교 의례를 거부하다가 절에서 쫓겨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불교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순교자 가운데는 승려생활을 하다가 퇴속한 인물들도 있었다.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김유산은 원래 승려였다. 그는 충청도 보령의 역말에서 천인으로 출생해서 승려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홍산 땅에서 신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그를 입교시켰고, 그는 이존창의 부탁을 받아 1798년과 1799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교회의 사정을 베이징 교구의 주교에게 비밀리에 전달한 바 있다. 한편 1866년 10월에 서울에서 순교한 데레사라는 여성은 본래 비구니 생활을 하다가 퇴속하여 천주교를 봉행했다. 그는 방물장수를 하다가 60여 세의 나이에 두 명의 여성신도들과 함께 잡혀 순교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불교를 분명히 거부하였다. 순교자 신대보가 남긴 편지를 보면 한 국왕이 한 교우를 친히 신문하면서 불교에 대해 주고받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교우는 불교와 천주교를 상호 비교하는 것마저도 거부한다. 그 교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불교와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천주의 은혜에 의해야만 생겼으며, 보존되며, 또 다른 은혜 곧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위대하며 우주의 어버이시며 주재자인 천주의 강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석가여래는 정반왕과 마야 부인의 아들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 교우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인 석가모니를 같은 반열에 놓아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천주교와 불교가 다르다는 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 우리는 이 점을 1797년의 순교자 이도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체포되어 왜 유교나 불교를 믿지 않고 천주교를 믿느냐는 신문에 대답하기를, “저는 무식하여 선비들의 몫으로만 되어있는 ‘공맹지도’(孔孟之道)는 알지 못하며, 불교는 중들에게만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모든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천주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부처 공자 맹자 임금과 신하 등은 천지창조 후에 생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 문호가 개방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창조주 천주 앞에 평등한 가르침을 지키고자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었다.

 

 

맺음말

 

박해시대 신자들에게 고해성사에 앞서 양심성찰을 이끌어주던 “성찰기략”이란 책자가 있다. 여기에 보면 당시 교회에서도 “부처를 위하는 일을 하거나 도와주거나 심부름하기를 금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사전에 막으려고 신자들은 입교 과정에서 천주의 존재에 대한 교육을 하여 부처에 대한 숭배가 이단이요 미신임을 제시해 준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정약종의 “주교요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박해시대에는 불교에 대한 인정과 공존을 위한 노력보다는 상호간의 대결의식이 강했다. 아마도 이는 천주교 신앙의 초창기에 천주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강력히 전개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다종교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는 타종교에 대한 상호 존중의 자세일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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