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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개항기 선교사와 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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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01 ㅣ No.187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개항기 선교사와 교안

 

 

우리나라 역사에서 ‘개항기’라 하면 1876년 한일수호조약을 통해서 문호를 개방한 이후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조선왕조가 멸망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때 우리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다. 또한 이 시기 우리 교회사에서는 각종 교안(敎案)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교안’이란 천주교 선교사 또는 신자들과 관련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교안은 교회나 신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이나 민사사건 등 소송을 비롯해서 교회와 지방 행정기관과 충돌하는 등 여러 형태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개항기 천주교는 자신의 권리를 확인하기도 했지만, 당시 사회에서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교안이 일어난 배경

 

교안이 발생하게 된 배경으로는 먼저 당시 신앙의 자유에 대한 확실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교회는 1886년에 맺은 한불조약을 통해서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받았고, 그들은 조약상에 규정된 “가르칠 수 있다”[敎誨]라는 구절을 확대 해석해서 선교할 수 있는 권리까지 묵인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1895년 고종과 뮈텔 주교의 만남으로 선교의 자유가 명확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앙의 결정을 정부의 관리나 지방 여론 주도층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였고, 천주교 문제에 대해 그들은 관행적으로 부정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당시 신자와 선교사들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전하였으며, 이 때문에 교안이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개항기 교안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조선이 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들 수 있다. 이 불평등 조약으로 외국인들은 조선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는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고, 프랑스 선교사들도 사실상 치외법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더욱이 그들은 중국에서 동료 선교사들이 누리는 선교보호권(protectorat)에 대해 잘 알았다.

 

물론 한불조약에는 선교보호권에 대한 명백한 규정은 없었지만, 이와 같은 중국 선교사적 특권을 조선의 선교사들도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치외법권적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조선 관리들이 저지르는 교회나 신자들과 관련된 일에 대한 월권 또는 착취행위에 정면으로 맞섰고, 이를 서울 주재 프랑스공사관과 연결시킴으로써 외교문제화 해 나갔다.

 

한편 개항기 교안의 배경에는 당시 선교사나 신자들이 가졌던 박해에 대한 보상 의식도 어느 정도 작용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박해에 시달렸던 신자들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 회복에 민감했다. 그리하여 신앙과는 무관한 사건으로 받게 되는 불이익마저 자신의 신앙과 연결시켜, 일반적 이익을 지키려고 신앙공동체나 선교사의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물론 선교사들은 ‘부당하게’ 당한 박해시대의 손해배상을 요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개항기에 이르러 자신들이나 신자들과 관련된 모든 사건에서 보호자로 자처하며, 치외법권과 프랑스 공사관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해결사 노릇을 했다. 또한 치외법권을 가진 그들은 자신의 신변보호를 목적으로 무장을 갖추기도 했으며, 지방관의 횡포에 맞서 문제를 제기했고, 재판이나 투쟁을 통해 교회와 신자들의 권리를 확보해 갔다.

 

 

교안의 실상

 

교안은 1886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교안이 발생하던 초기에는 대부분의 사건이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고 강화하려는 성격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가서 교안은 선교사들의 힘에 의지하려는 이른바 ‘양대인자세’(洋大人藉勢) 때문에 심각해졌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법이 무력했고, 정부가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정부의 가렴주구를 피해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더 강한 힘을 찾았으며, 그들이 찾은 곳은 ‘치외법권적’ 존재인 선교사였고 교회였다.

 

따지고 보면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이 1897년에 영세 입교한 것도 중앙정부의 부당한 권력에 맞서려는 측면이 있었다. 안태훈 같은 유력자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관리들의 등쌀에서 벗어나고자 천주교의 문을 두드렸다. 충청도 일부지역에서는 입교용 교리서였던 “천주교요리문답”이 동이 나자 웃돈이 붙어 거래되기도 했다. 1900년 초 황해도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다음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너 무엇을 위하여 성교에 나오느냐?’ 문답 첫 조목의 대답에는 입으로는 책에 쓰인 대목대로 ‘천주를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함을 위함입니다.’ 하고 급행열차 식으로 내려 외우지만, 마음에는 ‘서양사람 덕택으로 세도도 좀 부리고 생명 재산을 보호받으려 성교에 나옵니다.’ 하였다. … 입으로는 문답과 십이단을 외우고 손에는 묵주를 흔들면서 돌아다녔지만 그 행동은 외교인에서 다를 바 없었고, 점점 성교회와 서양신부의 세도를 이용하여 온갖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되어 주민의 감정과 관료들의 분은 종(腫)처럼 곰기고 또 곰겼다. 욱일승천의 세도를 한참 부릴 때 사리원 근처에 있던 이런 교우들이 누백년 귀신으로 섬겨오던 당나무만 골라다가 강당을 건축할 때 주연을 배설하고 위풍을 떨친 시절이 그들의 전성시대였던 것이다”(김구정, ‘준자치교구황해도 역방기’ “가톨릭 연구” 제2권, 제4호. 1935. 4.).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들은 주민과 지방관들과 충돌했고, 여러 종류의 교안이 일어났다. 1895년 원산에서는 브레(Bret) 신부가 숙소의 울타리를 넘어온 지방민에게 발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펴내던 간행물에서는 이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기도 했다. 물론 조선의 일반 간행물에서도 이 사건을 크게 취급했지만, 이는 서양인의 치외법권으로 유야무야되었다.

 

선교사의 힘을 등에 업은 신자들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개항기 당시 정읍에서 선교하던 미알롱 신부는 신자들을 압박하던 양반을 붙들어다 그 상투를 말꼬리에 묶어 조리돌림을 하기도 했다. 전주의 보두네 신부는 1901년 자신의 사제관에서 신자와 외교인 간의 분쟁에 개입하여 사사로이 재판을 하기도 했다. 이 일은 ‘양관사판’(洋館私判) 사건으로 불리며 교회 안팎의 비난을 받았다.

 

1897년 “독립신문”에서는 “천주교 신자라도 조선 사람이면 임금님의 신민이므로 조선의 관리가 법을 밝혀서 사(私)가 없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4년에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당시 가장 급한 일로 천주교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각종 폐단인 ‘교폐’(敎弊)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나머지 말

 

개항기 조선 선교사들의 특권적 행동은 분명 선교에 도움을 준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특권과 관련하여 발생한 교안과 같은 단편적 사건은 당시 교회가 이룩한 여러 긍정적인 일에 대한 정당한 평가마저 흐리게 했다. 교안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도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제 막 민족주의적 각성을 하게 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인 신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교회와 동일시하여 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민심은 천주교회를 떠나가고 있었으며, 백년이나 뒤늦게 들어온 개신교 형제들이 우리 사회에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고 있었다.

 

교안은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던 190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상실했다. 조선 정부로부터 보장받던 선교사의 치외법권도 이때에 이르러 소멸되어 갔고, 교회와 관련된 사건은 외교문제가 아닌 일반 소송사건으로 처리되었다. 역사적 가정(假定)이란 없는 것이지만, 만일 우리나라에서 교안이 지속되었더라면, 아마도 1920년대의 중국보다 더욱 격렬한 반교회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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