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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트리엔트 공의회1 - 신앙의 분열과 교회 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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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01 ㅣ No.186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트리엔트 공의회 (1) 신앙의 분열과 교회 쇄신

 

 

어느 시대에나 올바른 믿음으로 살겠다는 열정이 지나쳐 이단으로 흐르는 사람들은 많았다. 흔히 교회 개혁을 외치며 현실 제도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오로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곧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루터의 주장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극심한 혼란을 빚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에 루터의 41개 명제를 단죄하며 파문 경고 칙서를 보냈으나(Exsurge Domine, DS 1451-1492), 루터는 이를 찢어버렸다. 그는 이듬해 1월 3일에 파문을 당했다. 루터는 거듭 공의회에 항소하며 보편 공의회 개최를 요구하였다.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에서든 공의회 소집 요구가 드높아졌다.

 

교황대사는 “모두 공의회를 외치고 있다.”고 보름스 제국 의회에 보고하였다. 뉘른베르크 제국 의회는 “독일에서 공동의 자유로운 그리스도교 공의회”를 요구하였다. 교황청에서는 ‘자유’라는 말을 ‘교황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와 사회의 혼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독일의 칼 5세와 맞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세력 균형을 위하여 독일보다는 프랑스를 지원하였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동맹군을 물리쳤는데, 승리를 한 황제군이 제때에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였다(1527년). 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대가 몰살당했고, 베드로 대성전은 마구간이 되어버렸다. 이 로마 약탈로 바티칸의 르네상스는 막을 내렸다. 독일 지방은 제후들과 손을 잡은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휩쓸었다. 투르크족이 지중해를 위협하고 있었다.

 

독일 교회의 혼란을 가라앉혀야만 했던 칼 5세는 황제 대관식에서 조건부이긴 하지만 공의회 소집에 대한 교황 승인을 받아냈다. 그렇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소극적이었다. 독일 교회의 분열을 외교력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황제는 교황을 만날 때마다 보편 공의회 소집을 독촉하였다. 새 교황 바오로 3세는 1536년 봄에 공의회 소집을 최종 승낙하였으나 독일의 안정을 바랄 까닭이 없는 프랑스는 공의회를 거부하였다.

 

교황과 황제는 1537년 5월 23일 만토바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을 일으켰고 프로테스탄트도 공의회 참석을 거부하였다. 가을에 공의회 장소를 비첸차로 옮겼으나 개회는 미루어지고 결국엔 무기한 연기되었다. 수장령으로 성공회를 세우고 로마와 갈라선 영국 왕 헨리 8세는 대륙 연합을 두려워하여 공의회 연기에 대단히 만족했지만, 독일의 가톨릭 신자들은 크게 낙담했다. 참석을 거부하던 프로테스탄트는 공의회 무산의 책임을 교황에게 전가했다. 그래도 황제는 공의회가 아닌 종교 토론을 통해서라도 프로테스탄트와 화합을 찾고자 하였다.

 

레겐스부르크에서는 교황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프로테스탄트와 의화론을 두고 토론하기도 하였으나, 교회가 무엇이냐는 개념부터 달라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교황은 아홉 명의 추기경들로 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반적인 교회 개혁안을 마련하고, 교황청의 개혁부터 추진하였다. 그즈음에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예수회가 조직되고 사도좌의 승인을 받아 교회쇄신의 선봉에 나섰다.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우여곡절 끝에 공의회가 트리엔트에 소집되었으나, 프랑수아 1세가 황제에게 다시 선전포고를 하였다. 프랑스는 가톨릭 황제에게 맞서 투르크족 무슬림과 동맹을 맺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황제는 프로테스탄트와 손을 잡았다.

 

공의회는 다시 연기되었다. 크레스피 강화조약이 맺어지고, 프랑스가 트리엔트 공의회 개막에 동의하였다. 교황과 황제는 프로테스탄트에 공동 대처하기로 합의하였다. 슈말칼덴 동맹의 무력을 와해시켜 프로테스탄트가 참석하는 공의회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 분열의 방지를 공의회의 첫째 목적으로 삼았다.

 

1545년 3월 15일 공의회가 소집되었으나 또 미루어지고, 그해 12월 13일에 가서야 트리엔트 주교좌성당에서 개막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 공의회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대한 추억 때문에 “보편 교회를 대표하는”(universalem ecclesiam reproesentans)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세계 전체 공의회”(Synodus oecumenica et generalis)라고 규정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참석 거부로 교회 일치라는 목적은 접어야만 했다.

 

이 열아홉 번째 세계 공의회는 무려 18년(1545년 12월 13일-1563년 12월 4일) 동안 중구난방인 프로테스탄트의 이단설에 맞서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수많은 개혁 교령들을 발표하여 교회 쇄신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공의회 교부들은 오로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분투하였다. 이 공의회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1545-1547년) : 교황 바오로 3세 시대에 제1차 회기부터 제10차 회기까지 주요 교리의 본질을 다루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곧 성경과 성전, 원죄, 의화, 세례와 견진성사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설명하였다. 황제와 교황의 군대는 프로테스탄트의 슈말칼덴 동맹과 전쟁을 하는 데 열중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공의회 장소를 옮기자는 이야기가 거듭되다가, 트리엔트에 전염병마저 돌아 제8차 회기의 결정에 따라 장소를 볼로냐로 옮겨 두 번의 회기를 더 열었으나, 제대로 토론을 진행하지 못하고 공의회의 연기만을 결정하였다.

 

제2기(1551-1552년) : 교황 율리오 3세가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속개하도록 명령하여 교회 개혁에 관한 교령들과 함께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시기에 제11차부터 제16차까지 여섯 번의 회기가 진행되었다. 공의회에 프로테스탄트 대표들이 나타났으나, 이미 발표한 교령들의 폐기를 요구하고 교황의 공의회 주재를 거부하여 대화는 단절되고 말았다. 프로테스탄트와 전쟁이 다시 일어나 다시 한 번 공의회가 중단되었다. 교황이 죽고, 새 교황 마르첼로 2세가 22일 만에 또 죽고, 새 교황 바오로 4세는 공의회를 열지 않았다.

 

제3기(1562-1563년) : 교황 비오 4세가 공의회를 속개하여 제17차부터 제25차까지 아홉 번의 회기를 진행시켰다. 이 시기에 미사성제와 영성체, 성품성사, 혼인성사 등에 관한 교리를 확립하고 신앙에 관한 주요 사안을 명백하게 정리하였으며, 성직자와 수도자들에 대한 개혁 교령을 발표하였다. 교회 생활과 규율의 개혁, 곧 교회 쇄신의 토대를 확고히 세웠다.

 

* 강대인 라이문도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번역실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10월호, 강대인 라이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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