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한글로 쓴 천주교 서적들 - 그들에게 구원을 준 책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21 ㅣ No.184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한글로 쓴 천주교 서적들

 

그들에게 구원을 준 책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파되려면 우선 그 지역의 문화와 만나야 한다. 한 지역의 문화를 이루는 데에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말이다. 말을 통해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고,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말은 ‘입말’과 ‘글말’로 나눌 수 있지만, 지식을 전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글말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글을 통해서 지식은 그 교류의 범위를 넓혀나갈 수 있고, 지식을 축적시켜 주고 이를 다음 세대에까지 전한다.

 

사람들은 이 글말을 효율적으로 전파하고 보존하려고 책을 발명했다. 책이 가지고 있는 이 힘은 18세기 이래 조선사회에서도 의연히 발휘되었다. 천주교 신앙의 전파와 수용이 책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문 천주교 서적의 수용

 

16세기 유럽 사회는 종교적으로 일대 개혁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이때 가톨릭에 대항하는 개신교가 출현했고,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자기반성과 함께 개혁의 물결이 넘쳐났다. 선교회들이 새롭게 조직되어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선교사업을 전개한 것도 개혁의 한 흐름이었다. 이 과정에서 예수회 회원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9년에 일본 선교를 시작했다. 예수회의 중국 선교는 1578년에 착수하였다.

 

중국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의 방법으로 과학기술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전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은 중국사회에서 그들이 지식인으로 대우받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그들은 원래 목적인 천주교 신앙의 선교를 위해 여러 종류의 책들을 지어서 보급했다. 중국 사람들이 읽을 이 책은 당연히 한문으로 간행되었다.

 

한편, 조선사회는 한문을 매개로 하여 거의 모든 고급지식을 중국과 함께 공유하면서 중국의 지식인들과 대등한 학문 수준을 누리고 있었다. 이 지식수준을 유지하려면 최신 고급정보를 계속해서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중국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에서 간행된 새로운 서적들을 부지런히 수입했다. 한문으로 쓴 천주교 서적들도 이와 같은 통로를 거쳐 조선에 전래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간행한 책들은 1603년 이래 조선에 전파되고 있었다. 17세기에 접어들어 조선의 지식인들이 읽었던 천주교 관계 서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였다. 이 책은 동양의 지식인들에게 세계관의 전환을 가져다 준 책이었다. 천주실의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은 “칠극”이나 “교오서론” 등과 함께 한자 문명권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었다.

 

당시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직접 전하기보다는 체계적으로 정리된 교리서를 통해 천주교를 소개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성경 번역에 앞서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들을 우선적으로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천주교의 윤리사상과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는 이 책들은 중국 북경의 대표적 서점가였던 유리창 거리에서 진열되어 팔렸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한문으로 간행된 이 책들을 구입하여 읽고 검토해 나갔다. 18세기 중엽 신후담과 같은 사람은 당시 조선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입장에서 이 책들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일신이나 이벽 등은 한문본 천주교 서적을 통해서 새로운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고, 그들의 사상에 새로운 지평을 확보해 나갔다. 그들은 조선교회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한글로 쓴 천주교 서적들

 

교회가 세워진 직후 조선교회의 주역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한문 서적을 이해하는 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지식인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다. 교회창설 직후부터 아녀자나 무식한 농투성이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렸고,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그들은 당연히 토박이 조선말로 하느님을 받들고자 했다.

 

일반 신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그 가르침을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교회의 지도자들도 열린 마음으로 교회서적의 한글번역을 시도했다. 초창기 교회에서 한글번역을 주로 맡았던 이는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최창현이었다. 또한 정약종은 천주교의 기본적 가르침을 순 한글로 명확히 설명하는 “주교요지”를 지어 보급했다.

 

초기 교회가 천주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려던 노력은 분명히 새로운 지적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는 한문교리서를 받아들여 읽었던 지적 운동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세워진 지 16년 뒤인 1801년 당시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던 120종 177권의 한문 천주교 서적 가운데 83종 111권이 한글로 번역되어 읽을 수 있었다. 신자들은 초기에 이 책들을 베껴 적어서 돌려보았다.

 

천주교 서적이 싼값에 보급되려면 인쇄본으로 간행되어야 했다. 천주교 서적의 간행에는 권일신이나 이승훈 등이 깊게 관여하고 있었던 듯하다. 당시 천주교 서적 한 권은 대략 쌀 한 말 다섯 되 정도의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싼값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필사본을 만들 때의 공력에 비교하면 월등히 저렴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천주교 서적은 충청도 내포지방에 살고 있던 가난한 농부들에게까지도 전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한글 천주교 서적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새롭게 찾아갔다.

 

박해시대 한글 천주교 서적은 교리문답이나 “천주성교공과”와 같은 기도서, 그리고 성인전이나 신심묵상서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간행되었다. 또한 “성경직해”와 같은 책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접할 수도 있었다.

 

한글로 된 교회서적들은 1864년에도 본격적으로 출판되어, 서울에 있던 목판 인쇄소에서 “신명초행”, “천당직로”, “성찰기략”, “영세대의”, “천주성교공과” 등 여러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작업은 다블뤼 신부의 노력으로 수행될 수 있었다. 그는 책을 출판하는 데에 힘쓰면서 “성찰기략”과 같은 책을 자신이 직접 한글로 저술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곁에는 황석두 루카와 같은 출중한 조선인 회장이 있었다. 황석두는 다블뤼 신부를 도와서 천주교 서적을 번역하고 이를 출판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만일 다블뤼 신부에게 황석두가 없었다면, 그처럼 유려한 한글로 된 교회서적들은 결코 간행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남은 말

 

한글 서적의 간행은 신앙의 전파와 실천 방식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1864년 이후 조선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열두 살을 먹은 소년들로부터 65세에 이르는 신자들은 교리문답을 모두 외워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70세 노인들까지도 문답을 외우고 이를 ‘찰고’받아야 했다. 이와 같은 규칙은 푸르티에 신부의 제안에 따라 시행되었고, 당시의 선교사들은 이를 힘들여 강조하며 규칙으로 삼았다(1862. 10. 칼레 신부가 미리내에서 보낸 서신). 이 조선교회의 관행은 한글로 된 “성교요리문답”이 간행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글 천주교 서적을 활용한 이와 같은 수련을 통해 신자들은 새로운 지식과 신심을 키워갔고 훗날 순교자로 태어날 수 있었다. 이 땅에서 책은 교회를 만들었고, 교회는 책을 만들 사람을 키웠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책을 통해 구원의 말씀을 이땅에 선포하였다. 책은 그들에게 구원을 주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6년 2월호, 조광 이냐시오]



47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