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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순교자의 우정 - 벗을 위해 죽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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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21 ㅣ No.183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순교자의 우정

 

벗을 위해 죽은 사람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벗을 사귀게 되고, 벗과 벗 사이에는 따뜻한 마음이 오간다. 우리는 이 따뜻한 마음을 우정이라고 한다. 우정을 나누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벗들에 대한 기본적 신뢰와 서로의 존경심과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때 그 우정은 더욱 커갈 수 있으며, 벗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걸 수 있게 된다. 사랑의 극치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행위이다. 우리 교회사에서 보면 이와 같은 우정의 사례들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박해시대에 피어난 프랑스인 선교사와 조선인 신도 사이의 우정은 박해시대 교회사가 만들어낸 역사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장주기와 황석두의 우정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신학교가 세워졌다. 이 신학교에는 푸르티에 신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 신부가 주재하면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학교는 늙은 회장 장주기 요셉이 명목상의 주인으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1866년 박해의 불길은 이 배론 신학교도 휩쓸었다.

 

박해의 과정에서 두 신부가 체포되었고, 집 주인이었던 장주기도 체포되었다. 장주기는 감옥에서라도 선교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돌보아야겠다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차마 그대로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푸르티에 신부는 포졸들에게 이야기했다. “불쌍한 이 노인을 어떻게 하려는 거요. 제발 자기 발로 걸어서 무덤에 들어가게 내버려두시오.” 그러고 나서 그는 몸에 지니고 있던 얼마간의 돈을 포졸들에게 주었다. 장주기 요셉은 즉시 풀려났다.

 

다음날 포졸들은 선교사들을 데리고 서울로 출발했다. 소를 타고 멀찌감치 두 신부의 뒤를 따라가던 장주기를 보자 신부들은 포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은 이 노인을 그냥 놓아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러니 저 노인을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그러자 포졸들은 장주기를 쫓아보냈다.

 

장주기는 마지못해 신학교로 돌아와 닷새 동안 머물렀다. 그러다가 배론에서 30리쯤 떨어진 ‘노럴골’에 있는 어느 교우집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또 체포되어 제천 현감에게로 끌려갔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들의 집주인이었다는 전력 때문에 서울로 이송되어 그가 지켜주고자 했던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처럼 순교했다.

 

장주기가 체포당해 압송되어 가던 두 신부를 뒤쫓아 가고자 했던 까닭은 그들에 대한 존경심 때문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당시의 열심한 신자들처럼 순교자가 되고자 하던 원의가 강했다. 그러나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돈을 찔러주며 장주기를 풀어달라고 했던 까닭이나, 장주기가 압송되어 가는 선교사의 뒤를 따라가고자 했던 다른 이유는 그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경, 곧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훗날 장주기는 성인품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지켜주고자 했던 두 신부는 시복시성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인과 우정을 나누었던 그 두 신부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었으리라.

 

1866년의 박해는 신자와 선교사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또 다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의 경우에서 이를 확인하게 된다. 황석두는 집안의 갖은 방해를 무릅쓰고 천주교 신앙을 실천했다. 그는 페롱 신부와 조안노 신부 그리고 베르뇌 주교를 도와 전교회장을 일을 하고 있었다.

 

1866년 3월 11일 다블뤼 주교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황석두는 자신의 운명을 다블뤼 주교와 함께하고자 했다. 주교는 그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말했지만, 황석두는 이를 거부했다. 다블뤼 주교의 요청을 받은 포졸들도 황석두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황석두도 다블뤼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충청도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황석두 루카가 다블뤼를 떠나서 자신의 살 길을 찾지 않았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물론 그들은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던 신앙을 같이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자신의 지성으로 체포된 자신들의 앞길을 내다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블뤼와 그 사이에 존재하던 상호존중과 우애의 감정은 신앙으로 맺어졌던 그들의 연대를 더욱 굳게 해주었다. 이러한 여러 이유들이 복합되어 황석두 루카는 다블뤼 주교를 따라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박상근과 칼레 신부의 우정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읍 마원 1리에 가면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있다. 지금은 성지로 가꾸어진 이곳에는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인 신자 사이에 맺어진 또 다른 우정의 장면이 새겨져 있다.

 

때는 1866년의 박해시대였다. 박해 여파가 경상도에 미쳐 한실에 거주하던 칼레 신부는 문경의 아전이던 박상근 마티아의 집으로 피신했다. 칼레가 박상근을 택해서 피신하고자 했던 데에는 아마도 그들 사이에 신뢰와 존경에 기초한 일종의 우정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칼레 신부는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다. 박상근과 칼레는 허겁지겁 집을 나와서 소백산맥의 첩첩산중을 헤매게 되었다. 풀뿌리로 배를 채우고 시냇물로 목을 축인 칼레 신부는 자신이 박상근에게 큰 짐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방 고을의 아전 자리에 있던 그는 집에 돌아가면 충분히 살아남을 방안이 있을 터인데도 외국인 선교사인 자신과 함께 다니다가 잡히면 틀림없이 죽게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벗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칼레 신부는 박상근에게 자신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그러나 박상근은 이를 마다하고 한사코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길이 설고 생김새가 다른 선교사를 홀로 가게 하면 곧 잡히거나 굶어 죽게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칼레 신부는 결단을 내려 박상근에게 신부의 말에 순종할 것을 강한 어조로 명했다. 그러고는 박상근의 손을 감싸 쥐어주고서 산 속으로 내닫듯이 사라졌다. 산길에도 어둡고 얼굴 생김새도 다르니 틀림없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이었지만 칼레는 용감하게 박상근을 떨치고 일어섰다. 떠나는 그를 보며 박상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칼레 신부는 그 뒤 또 다른 신자의 도움을 받아서 용하게 살아남아 충청도 해안가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살아남은 세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여 살아남았다. 그리고 칼레는 그곳에서 자신을 떠나보내야 했던 박상근의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그 뒤 곧 조선에 다시 입국하여 선교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하여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로서 자신이 선교했고 자신의 동료들이 피를 흘린 조선을 위해 평생을 기도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말

 

선교사와 신자 사이에 맺어졌던 우정은 우리나라 교회사를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안목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래 우정은 서로 평등하다는 의식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된다.

 

만일 선교사들이 조선인을 야만에 가까운 하잘것없는 인간으로만 보았다면 거기에서 우정은 자리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인 신자들이 선교사를 자신과는 합치될 수 없는 부류로 판단했다면 거기에서도 우정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해시대의 여러 사례를 볼 때 선교사와 신자 사이에는 우정에 가까운 여러 특성들을 이상에서처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지배와 예속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6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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