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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배론 신학교의 신학생들 - 스승의 뒤를 따른 신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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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21 ㅣ No.182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배론 신학교의 신학생들

 

스승의 뒤를 따른 신학생들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미래를 짊어질 성직자 양성에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언제부터 신학생이란 칭호를 보통명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따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박해시대는 ‘학생’이란 말도 상당한 존칭으로 통하는 사회였다. 양반들이 그 조상의 칭호를 ‘학생부군’으로 표기한 사실에서 학생이란 용어가 존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해 당시의 신자들은 ‘선생’이라는 또 다른 존칭으로 신학생을 불렀다.

 

 

신학교 폐쇄와 신학생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는 배론 신학교이다. 이 신학교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1856년 당시 4명의 신학생이 있었고, 1862년에는 10명의 신학생들이 있었다. 박해로 폐쇄된 1866년에는 모두 8명의 신학생이 적을 두고 있었다. 이 학생들은 라틴어 과정에 4명, 신학과정 3년차에 2명, 삭발례자가 1명, 소품을 받은 사람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푸르티에 신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라틴어와 신학을, 장주기 회장에게는 한문을 배웠다.

 

1866년 당시 조선에는 12명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 12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두 명은 배론에 있는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가르쳤다. 그러나 신학교 교육은 박해로 말미암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866년 1월에 박해가 본격적으로 일어나자 정부 당국에서는 성양인 성직자들을 체포하는 일에 치중하였고, 배론 신학교에 있던 두 명의 선교사도 서울에서 파견된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 두 선교사는 체포된 직후 조선인 학생들이나 신자들은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무난히 선교사를 체포한 것에 만족한 포교들도 이 청을 받아들여, 8명의 신학생들은 풀려나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대략 4명의 신학생들이 박해시대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1866년의 박해 기록 가운데 발견되는 신학생 가운데 첫 번째의 인물로는 권동(權童) 요한이 있다. 그는 원래 수원 샘골에 살던 권양수의 아들로서 배론 학당에서 공부하면서 4품까지 받은 인물이다. 당시 신학생들이 성품성사를 준비할 때에는 대품(차부제품, 부제품, 탁덕품)을 받기 전에 4단계의 소품을 받아야 했다.

 

권동은 소품을 다 받고 이제 대품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는 신학교가 해산되자 자신의 출신지인 수원 땅 ‘건이’로 옮겨가서 학동을 가르치며 훈장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71년 2월, 그는 서울 포도청의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스승들의 뒤를 따라 순교하였다. 체포 당시 그의 나이는 30여세쯤이었다.

 

배론 신학당 출신 신학생 가운데 권 요한과 비슷한 나이의 사람으로는 김 요한이 있다. 신학생 김 요한은 서울 사람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주문모 신부를 모시다가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고, 그의 아버지 김백심 암브로시오도 1866년 10월 16일 충주 포교에게 체포된 뒤 서울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다.

 

신학생 김 요한은 김백심의 셋째 아들로 1835년에 태어났고, 아버지와 함께 충주 맹골면 방죽골로 터를 옮겨 살았다. 그 뒤 그는 페레올 주교 때에 신학생으로 발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교회에서는 1855년에 이 바울리노, 권 빈첸시오, 김 요한 등 세 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 반도 페낭 신학교에 유학을 보냈다.

 

바로 이때 김 요한은 비밀리에 말레이 반도 페낭에 있는 신학교에서 6년 동안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였다. 1862년에 귀국한 김 요한은 배론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력이나 나이를 감안해 보면 그가 1866년 박해 당시 삭발례자로 신학교에 있던 사람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1866년의 박해로 말미암아 그도 집으로 돌아가 큰형인 김성회 바오로와 함께 충청도 진천 굴티에서 살다가, 박해가 심해지자 1867년에 목천 복구정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1868년 4월경에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고, 서울에서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김 요한이 순교할 때 나이는 31세였다.

 

 

신학생 유 안드레아의 순교와 박 필리보의 활동

 

배론 신학교 출신 신학생 가운데 세 번째로 확인되는 인물은 유 안드레아이다. 그는 안성 출신이다. 그의 부친 유 바오로는 서울 양화진에서 1866년에 참수 치명하였다. 안드레아는 11세부터 6년 동안 신학당에서 ‘신품 공부’를 하였다. 그의 가족이 경기도 수리산에 살 때 그의 재주가 뛰어난 것을 본 베르뇌 주교가 신학생으로 발탁하였다. 그는 배론 신학당에서 푸르티에 신부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1866년 1월에 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를 면한 유 안드레아는 경기 과천 수리산에 있는 본가로 돌아와 독실하게 수계생활을 하였다.

 

박해가 심해지자 신학생 유 안드레아의 가족들은 박해를 피하여 흩어졌고, 그의 모친은 서울로 피했다. 1868년 유 안드레아는 어머니를 찾아 서울에 왔다가 신자들을 잡아들이는 데에 악명을 떨치던 포졸 ‘피록이’에게 염천교에서 체포되었다. 좌포도청에 끌려간 그는 배론 신학교에서 공부한 이력이 드러나 더욱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그해 8월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한편 배론 신학교 출신 신학생 가운데 특이한 인물로는 박 필립보가 있다. 체포를 면한 그는 어렵사리 리델 신부와 접촉하였다. 이 사실은 그가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교회의 재건과 선교사의 안전을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말한다. 그의 이름은 1866년 박해 당시 간혹 교회 기록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생 박 필립보의 이름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오페르트를 통해서였다. 오페르트는 흥선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인물이다.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리델 신부는 1866년 2월 이양선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이양선이 바로 오페르트가 타고 온 로나호였다. 리델 신부는 자신들을 구해달라는 편지를 써서 박 필립보 등을 통해 이 배에 보냈다. 오페르트는 리델 신부가 보낸 편지의 내용과 그 편지를 전달받은 1866년 6월 어느 날의 광경을 기록에 남겼다. 군중들의 눈을 피해 한 사람이 몸을 숨기고 접근해서 오페르트에게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였다.

 

“나는 필립보라는 조선인 신학생입니다. 두 선원들과 의논해서 어젯밤 자정 전에 우리들의 목적지인 이 자리에 도착해서 밤새도록 기다렸습니다. 오늘 저녁 어두워진 뒤에 작은 배를 보내 우리를 데리고 가줄 수 있다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에 이 자리에 나타나겠습니다.”

 

이 모습을 오페르트는 “가엾고 초라해 보이는 조선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서 마치 평생을 라틴어만 쓴 것처럼 글을 쓰는 광경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고 감탄하고 있다.

 

 

남은 말

 

배론 신학교는 해산되었지만 그곳에서 공부하던 몇 안 되는 신학생 가운데 세 명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배론 신학교는 이리하여 순교의 전통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배론 신학교의 전통에 뿌리를 대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모든 신학교도 이 자랑스러운 순교 전통을 직접 이어받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 신학교 교육을 받은 박 필립보는 페낭 신학교 출신 못지않은 라틴어 실력으로 리델 신부의 탈출을 도우려고 하였다.

 

이처럼 배론 신학교 출신 신학생들은 뜨거운 신앙심으로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고, 지성을 활용하여 박해받는 교회를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아마도 이 전통은 오늘의 우리나라 신학교들에도 살아있을 듯하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6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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