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중국 방문 신자들 - 선교사를 위해 목숨을 건 여행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9 ㅣ No.179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중국 방문 신자들

 

선교사를 위해 목숨을 건 여행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19세기 말엽까지 중국을 비롯한 해외여행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곳을 여행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국가 간의 외교에 종사하던 사신과 그 수행원들뿐이었다. 17세기경에 이르러서야 사신행차에 어울려서 몇몇 장사꾼들이 중국에 갈 수 있었는데, 서울에서 중국의 북경까지 왕래하는 데에 대략 5-6개월이 걸렸다. 이들의 여행길은 매우 고달팠다. 여행길에 병을 얻거나 사고를 당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여행은 문화교류의 통로였고, 우리의 천주교 신앙도 어찌 보면 이 여행을 통해서 들어올 수 있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는 길

 

조선에서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이르는 길은 흔히 3천 리 길이라고 계산해왔다. 우리 조상들은 이 먼 여행길에 구입해 온 천주교 서적을 연구해서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터득할 수 있었다. 1784년 조선교회 창설에 크게 공헌한 이승훈도 베이징을 여행하면서 그곳에 있던 성당 가운데 하나인 북당(北堂)에서 세례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조선교회가 세워진 직후부터 교회의 지도자들은 베이징으로 밀사를 파견하여 가르침을 받아왔다. 당시의 대표적 여행자는 윤유일이었다. 그는 스승인 권일신과 이승훈이 작성한 편지를 가지고 장사꾼 행세를 하며 사신들을 따라 길을 떠났다. 원래 어려서부터 집에 들어앉아 공부에만 전념하던 선비 윤유일은 아무런 여행경험도 없었다. 그에게 이 여행은 매우 고생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두 차례에 걸친 베이징 여행을 통해서 조선교회의 당면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베이징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했다. 주문모 신부도 거룩한 여행자가 되어 한겨울의 추위를 무릅쓰고 조선에 오는 험한 길을 밟아왔다. 그는 1795년 초에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교와 연락하고자 조선인 신자들을 베이징에 파송했다. 그러나 1801년 조선교회는 일대 박해에 직면했다. 주문모 신부는 이 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했고, 중국교회와 조선교회의 연결고리 구실을 하던 황심이나 옥천희도 죽음을 강요당했다.

 

박해가 지난 후 1811년에 이르러 살아남은 신자들은 교회 재건을 논하며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베이징 주교를 통해서 교황청에 보내기로 했다. 이 일에 이여진 등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동지사행에 따라가서 조선교회의 편지를 베이징교구에 전달하였다.

 

이여진의 뒤를 이어 조선교회의 밀사로 베이징 여행을 감행한 이는 정하상이다. 그는 1816년 겨울 처음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당당한 양반의 후예였지만 역관의 하인으로 위장하여 베이징에 들어갔다. 정하상은 이렇게 고생길을 사서 걸으며 전후 아홉 차례에 걸쳐 중국을 찾았다. 그의 수호성인인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도 험한 여행길을 마다하지 아니했다. 이로써 그는 조선교회의 사도 바오로가 되었다.

 

정하상과 동료 밀사들은 선교사를 맞아들이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 노력의 결과로 입국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1839년의 박해를 통해서 순교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행길을 조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선교사를 맞아들이는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해야 했다.

 

 

바닷길을 통한 연락

 

조선의 근해에는 17세기 이래 이양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세기 전반기에는 그 출현 빈도가 더욱 높아졌다. 이양선의 존재는 바닷길을 통한 대외 교류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사건이다. 그러기에 18세기 말엽 주문모 신부가 선교하던 시절, 조선인 신도들도 바닷길을 통해서 서양 선교사들을 보내 달라는 소망을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우리 교회에서 바닷길이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시점은 1831년 조선교구가 베이징 교구에서 독립되어 베이징과 조선교구의 관련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이후였다.

 

선교사들이 변문으로 조선에 입국한 사실을 알게 된 조선정부는 의주 일원의 감시를 배가했다. 이 삼엄한 경비 때문에 1844년 페레올 주교는 변문으로 입국하려다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1800년대 당시, 조선교구를 위임받은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대표부는 베이징과는 거리가 먼 중국의 남방 마카오에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하는 경로로 멀고 까다로운 육로보다는 바다로 눈을 돌린다.

 

그리하여 전교회는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바닷길 개척을 김대건에게 요청했고, 그는 모험을 강행했다. 조선에 잠시 입국한 김대건은 조선의 재리식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무모하리만치 용감하게 나침반 하나에만 의지하여 자신도, 선원들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난바다를 향해 1845년 4월 30일 조선을 떠났다. 항해를 지휘한 경험이 전혀 없는 김대건이 그 배의 선장이요 항해사였다. 거친 황해를 건너간 그의 배는 길이가 약 7.6미터, 넓이가 2.7미터, 깊이가 2.1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돛단배였다.

 

부제 김대건은 험난한 항해 끝에 1845년 5월 28일 황해를 건너 상하이 부근에 있는 우숭(吳淞)에 도착했다. 그들은 29일 만에 땅을 밟아볼 수 있었다. 김대건 일행은 폭풍으로 파괴된 배를 수리하고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더 태웠다. 그리고 거쳐 왔던 바닷길을 되짚어 항해하여 충청도 강경 부근의 해안을 통해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 뒤 바닷길은 선교사를 모시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1850년대 철종 연간에는 이렇게 바닷길을 통해서 선교사들이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그러나 1866년에 대규모의 박해가 일어났고, 이때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가운데 9명이 잡혀서 순교했다.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은 신자들은 체포를 모면한 3명의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탈출시키는 일에 또다시 목숨을 걸었다.

 

충청도 신창에 살던 강 요한 회장은 선교사를 실어 나를 배를 준비해서 리델 신부 등을 탈출시켰다. 그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뒤 1867년에 신창에서 체포되어 서울 양화진에서 참수 치명했다. 이 준비 작업에 함께한 원동지 베드로 노인도 체포되어 1866년 10월 18일 서울 양화진에서 순교했다.

 

중국으로 배를 띄우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뒤 1867년에도 조선인 신도들은 조선교회의 사정을 전하려고 중국으로 배를 보냈고, 이 일에 관여한 김흥범은 체포되자 비밀을 지키려고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남은 말

 

박해시대 우리나라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일은 매우 모험적인 것이었다. 신앙의 선조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기나긴 여행을 통해 신앙을 실어 날랐다. 조선교회를 위해 입국하려던 선교사들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험난하기 그지없던 땅길이나 바닷길을 거쳐 온 여행자였다. 이 위험을 무릅쓴 여행을 통해서 조선교회는 성장할 수 있었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장사꾼이나 노복으로 위장하여 고생을 무릅쓰고 중국을 다녀왔다. 때때로 그들은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거친 파도를 헤쳐가며 선교사들을 모시고 왔다. 박해에서 살아남은 선교사들을 험난한 바닷길로 피신시키는 일도 그들의 몫이었다.

 

그들의 여행은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그들은 긴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안도하기는커녕 자신의 비밀스런 여행 때문에 항상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 여행을 감행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들이 목숨 걸고 보호하고자 했던 선교사의 이름은 쉽게 기억해도, 이를 위해 목숨을 건 아름다운 이들의 이름자는 가물가물하다. 우리 교회사의 공동 주역인 그들에게서 우리 마음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목숨 건 그 여행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영악한 사람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6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



40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