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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 교우촌의 담배농사 - 강림초라 하여 높은 값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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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19 ㅣ No.17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 교우촌의 담배농사

 

‘강림초’라 하여 높은 값 받아

 

 

박해시대 신자들은 신앙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이를 지키려고 온갖 고통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누일 수 있는 오두막이라도 가져야 했고, 하루 두 끼는 먹어야 할 수 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고자 외진 산골을 찾아 마을을 이루어 살아갔다.

 

그 교우촌에 살던 평범한 교우들을 먹여 살린 생업은 무엇이었나? 흔히 박해시대 교우촌의 대표적 생업으로 옹기제작을 든다. 그러나 더 보편적인 생업으로는 화전을 일구어 담배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담배는 19세기 전반기 사회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요한 기호품이었고, 시장에 내다 팔아서 쉽게 돈이나 곡식을 마련할 수 있던 특용작물이었다.

 

 

교우촌의 형성

 

교우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게 된 교우촌의 영원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1791년 박해 직후로 추정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신앙이 성행하던 서울과 충청도 등지에서는 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는 특히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시킨 충청도 내포지역의 신앙공동체를 파괴했다.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향리를 떠나 더 깊은 산골로 흩어져갔다. 1801년 황사영이 피신한 배론도 이렇게 이주한 충청도 내포지방 신자들이 살던 곳이다.

 

우리나라 향촌사회는 17세기 이후 급격한 변화과정에 놓여있었다. 지주들의권세가 강화되던 과정에서 자신의 경작지를 잃게 된 가난한 농민들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들의 세간은 몇 명의 가족들이 이고지고 떠나도 될 만큼 빈약했기 때문에, 그들은 쉽게 향리를 떠날 수 있었다. 떠돌이가 된 그들은 남의집살이를 하거나 남의 땅을 부쳐먹기도 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떠돌다 자리 잡아 머무는 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갔다.

 

신자들도 박해가 일어나면 살던 곳을 떠나 산골로 들어가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야 했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들면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물론 기존의 마을에 들어간 신자들이 그곳 주민들에게 선교하여 교우촌을 만든 경우도 없지 않았다. 교우촌을 일군 신자들도 산골로 들어가 자신의 농업기술을 발휘하여 생계를 겨우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산에 불을 놓아 비탈밭을 만들고 거기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들이 ‘산(山)농사’라 하기도 했던 화전이 이렇게 도처에서 경작되고 있었다.

 

박해시대 교우촌의 신자들은 “밭농사로밖에는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일찍이 씨앗을 뿌려본 일이 없는 곳, 산과 골짜기, 가파른 비탈, 무서운 절벽밖에는 만나지 못하는 곳에 무슨 농사를 짓겠는가. 거기에는 이 나라의 주식인 벼는 자라지 않았다. 약간의 조, 밀, 약간의 야채, 그리고 주로 담배, 이런 것이 그 거친 땅의 유일한 산물이었다. 가장 열심한 신자들이 앞장서 갔으므로 차차 다른 신자들도 뒤를 따라와서 산중에서 살게 되었다. 해마다 그들의 수가 늘어나 이것이 오래지 않아 가난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신자들은 주로 산농사를 지었고,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화전을 간 사람들이 신자들이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당시 신자들이 그처럼 특별한 열의와 기술을 가지고 화전개간에 투신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담배농사와 교우촌

 

선교사들은 담배가 조선의 주요산물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전래된 시기는 대체로 17세기 초엽으로 보고 있다. 그 뒤 담배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기름진 땅에서까지 재배되어 식량생산에 방해가 된다는 불평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담배는 경작 단위면적 당 수익률이 매우 높은 농작물이었다. 때문에 가난한 농민들은 앞 다투어 담배농사를 지었다. 주요시장에서는 담배가 거래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담배는 청나라와 교역하는 데서도 중요한 수출품으로 자리 잡았다.

 

바로 이때 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찾아들어가 화전을 일구었고 교우촌을 이루어갔다. 교우촌의 주된 산업도 당연히 당시 시장에서 인기품목이던 담배 재배였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신부는 초기에 자신이 살던 교우촌에서 주로 담배가 경작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너도나도 담배농사를 하는 통에 때로는 공급과잉으로 담뱃값이 폭락하기도 했다.

 

“모두가 담배농사를 시작하였으므로 담배가 너무 많이 나서 값이 폭락하게 되어 페레올 주교가 도착했던 1845년에는 세 냥이라는 하찮은 돈만 내도 장정 두 명이 지고 갈 만큼 줄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가엾은 우리 신자들은 쉬지 않고 일하여 겨우 굶어 죽지 않을 만한 것밖에는 얻지 못하였다.” 이처럼 조선 교우촌의 신자들은 선교사들이 고국에서 들었던 ‘성당의 쥐’보다도 더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선교사들은 교우촌의 가난한 신자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곧, “박해 때문에 아주 외딴 곳으로 밀려난 그들은 굶어죽지 않으려고 땅을 개간하였고, 몇 해 동안 경험을 쌓은 덕으로 이런 종류의 땅에 가장 알맞은 경작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들의 시도가 성공하는 것을 본 외교인들이 그들을 본받아 지금은 많은 산이 일구어졌다. 담배가 이런 높은 곳에서 나는 주요한 농산물이며, 조도 곧잘 자라고 대마나 몇 가지 야채도 꽤 잘되지만 목화는 아직 길들이지 않았다. 들판의 농사보다 훨씬 더한 노력이 드는 이런 종류의 농사지만, 그 대신 가난한 농부들에게 크나큰 이익이 된다. 세금이 덜하고 나무와 풀과 야생과일이 사방에 얼마든지 있다. 굉장히 많이 소비되는 무가 담배포기 사이에서 썩 잘 자라서 귀중한 식료품을 공급해 준다. 불행히도 땅이 꽤 빨리 척박해져서 골짜기에서는 쉬는 밭을 보는 일이 결코 없는데, 산에서는 얼마 지나면 여러 해 동안 땅을 놀려야 한다. 그러고도 처음 일구었을 때에 가졌던 생산력을 다시 찾는 일은 거의 없다.”

 

신자들이 담배농사를 집중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담배의 품종을 가리키는 단어 가운데 ‘강림초’라는 말이 생긴다. 1960년대까지도 경기도 북부지역의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 단어는 성령강림절을 전후한 때에 심은 담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담배는 특히 품질이 우수하여 시장에서 환영을 받았다. 장사꾼들 역시 말뜻을 자세히 모르면서도 신자 농사꾼의 말을 따라 이를 ‘강림초’라 불렀고, 높은 값을 쳐주었다.

 

한편, 농사꾼이 아닌 신자들은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옹기를 빚을 적당한 흙과 땔감인 나무가 풍부한 곳에서 옹기를 굽는 옹기점을 열고,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수고로운 삶을 살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신앙에 기쁨을 가졌고, 서로 도우며 믿음을 이웃에 전파해 갔다. 교우촌은 회장의 지도로 생산과 소비를 공동으로 영위하기도 했다. 박해시대 교우촌에서는 재산을 공유했다는 증언도 있다.

 

 

남은 말

 

박해시대 신자들의 교우촌 생활은 1889년 전라도 지방에서 전교를 하던 보두네 신부의 다음의 말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신입 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 와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아가페를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예비신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

 

박해시대 조선 신자들은 가난하고 박해 받았지만 지상의 천국에서 살고 있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6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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