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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술 권하지 않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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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72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술 권하지 않는 사회

 

 

인류학에서는 발효음식의 출현을 인간역사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 발효음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존재가 술이다. 알코올을 함유한 액체인 술을 빚은 흔적은 이미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의 유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왕(기원전 58-19년)의 탄생 설화에서 술이 등장한다. 술은 이처럼 애초부터 우리의 처음 역사와 함께 그 모습을 나타냈다.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음주가무’를 즐겨왔다.

 

술은 인생을 풍요롭게 해준다. 또한 생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주는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 이래 이 술 때문에 많은 일화가 만들어져 왔다. 술은 패가망신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우리 문화에서는 술에 대한 예찬과 함께 술에 대한 경계가 지속되어 왔다. 개항기 이래 우리 나라에 뿌리를 내린 개신교에서도 술은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금주는 자기 절제의 가장 뚜렷한 방법이므로 절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술을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

 

 

술 권하는 사회

 

조선에서는 주로 곡물을 발효시킨 막걸리나 약주와 같은 곡주를 마시고 있었다. 당시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곡물이나 과일에 여러 가지 약초를 넣어 술을 빚기도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기에 혐오스런 뱀까지도 술을 빚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조선인의 일상생활에 밀착하여 조선인과 함께 생활하며 조선의 술을 마셨다. 이러한 예는 다블뤼 주교의 1846년 10월 26일자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별별 잡동사니로 빚은 모든 종류의 술을 마시는데, 장님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기꺼이 마실 그런 술입니다…. 그러한 술을 차차 마시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뱀으로 빚은 술을 보고 장님이나 기꺼이 마실 수 있는 술로 규정한 듯하다.

 

그런데 박해시대의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조선인의 악습 가운데 하나로 과음벽을 지적했다. 선교사들은 과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명예로운 일로 생각하던 조선사회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사실 19세기 조선사회에서 술은 가정의 대소사에 반드시 등장했다. 손님 대접을 중시하던 양반사회의 관습에서도 술은 매우 중요한 음료였다. 이들은 술을 마심으로써 서로의 유대를 다졌다. 들판의 농부들이나 저자의 고공(雇工)들은 체력 유지에 필요한 열량을 술을 통해 보충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우리 나라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술을 마셔야 했고, 소설가 현진건(1900-1943년)의 표현대로 ‘술 권하는 사회’ 때문에 좌절했다. 19세기 박해시대를 살던 신도들 가운데에서도 간혹 이러한 좌절을 경험한 듯하다. 사실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낮은 신분의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신분제의 굴레에 얽매어 있었다. 또한 신도들은 일반 상놈들과는 달리 박해의 두려움까지도 감내해야 했다. 뭇따래기 포졸 등쌀에 신도들은 언제나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사회에서는 술을 권하는 일이 미덕의 하나였다. 그러기에 신자들은 술을 마셨고 더러 폭음을 하기도 했다.

 

 

술 권하지 않는 사회

 

박해시대 신도들이 고해성사를 준비하며 자신의 양심을 성찰할 때 사용했던 「성찰기략」에서는 술을 경계하고 있다. 1864년에 간행된 이 책에서는 탐도(貪:)의 내용을 제시하면서 “술을 과히 먹고 취하거나 주정하기를, 술을 과히 먹고 몸을 해롭게 하거나 세간을 흩기를, 남을 권하여 술을 과히 먹게 하거나 취하게 하기를 성찰하라.”고 하였다. 술을 지나치게 먹어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하거나 살림살이를 부수는 등 주정을 금했고, 다른 사람들을 꼬여서 취하게 하는 일도 금했다. 그리고 술로 인하여 본분을 궐하거나, 부모나 남을 상해하거나, 집안에 불목하거나, 행음(行淫)하는 일은 원래의 죄에 탐도의 죄를 더하는 일로 규정했다.

 

또한 개항 이래 선교사들은 「회장직분」과 같은 책을 통해서 장례를 당했을 때 신자들이 모여서 떠들거나 술 마시고 주정함을 금하면서 상가에서 술과 음식을 절제하도록 가르쳤다. 공소를 방문하기 전에 신자들에게 돌렸던 서한의 일종인 ‘배정기(排定記)’에서도 술의 피해를 경계하는 글을 볼 수 있다. 개항기 천주교회에서 술을 경계한 대표적 기록은 공안국 신부가 1902년 신자들에게 보낸 배정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공 신부는 술을 적절히 마시면 원기를 도와서 육신의 약이 된다고 보았다. 이는 당시 조선의 개신교에서 전개하던 금주론과는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던 견해였다. 그러나 그는 술이 광약(狂藥)이요 사약이라고까지 규정했다.

 

술을 마시다보면 천주께서 가르치신 도리를 망각하게 되고 자기의 주장을 술맛에 팔게 된다고 했다. 술은 천주의 지존한 모상인 인간을 날짐승이나 길짐승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시키니 천주를 거스르는 술에 취하는 일은 ‘죽을 죄’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술 취하는 습관은 지옥의 우물이라, 들어가기는 쉽고 나오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술 마시는 일에 각별히 조심하기를 깨우쳤다. 박해시대 이래 교회의 지도자들은 우리 나라가 ‘술 권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랐던 듯하다.

 

 

남은 말

 

술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준비해 주신 중요한 음식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인식은 서양교회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던 전통이었다. 더욱이 당시의 교회에서도 미사 성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포도주가 있어야 했다. 조선교회에서는 술 마시는 일 자체를 금지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신자들에게 폭음을 경계하며, 이에 대해서 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런데 당시 교회에서는 왜 술 마시는 일을 그렇게 경계했는가? 신도들은 왜 그다지도 술을 마셔야 했을까. 아마도 술을 마셨던 이유에는 박해시대의 사회, 식민지 사회가 자리잡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당대의 교회 지도자들이 술을 경계했던 일은 어떠한 난관에도 깨어있는 이성을 간직해야 한다는 당부였다. 술에 대한 절제를 권하는 일은 신자들의 생활혁신이나 풍속개량의 차원에서 전개되었다고 생각된다.

 

[경향잡지, 2003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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