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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아메리카에 알려진 우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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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60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아메리카에 알려진 우리 교회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명령에 따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 외에 다른 지역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신자들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어 다른 나라 신자들의 믿음살이와 살림살이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나라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창설 초기부터 여러 나라에 살고 있던 신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우리 나라 교회가 아메리카 대륙에 알려진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그리고 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우리 나라 교회와 세계교회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우선, 우리 나라 교회는 중국에서 번역된 한문 교리서를 연구하면서 창설되었다. 당시 유럽인 선교사들은 중국에 나와 천주교를 선교했다. 조선교회는 그 선교사들이 지은 한문 교리서를 연결고리로 삼아 가톨릭 신앙을 접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 선비들이 가톨릭 신앙과 만날 수 있었던 계기는 ‘지리상의 발견’이었다.

 

15세기에 진행된 지리상의 발견과정에서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구대륙간의 연결도 월등히 긴밀해졌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 한국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이 구체화되어 갔다. 그들 가운데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려는 목적으로 미지의 나라 한국에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우리 나라 지식인들도 서양이나 신대륙에 대한 인식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지식인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 지도 또는 지리서를 보며 자신의 지리적 지식을 넓혀나갔다.

 

우리 나라 교회가 창설된 1784년 이후 서양의 중심이었던 서유럽에서는 우리 나라에 대한 관심이 강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서양인 선교사들은 조선과 조선교회에 대한 소식을 서로 나누었다. 그리고 조선교회가 ‘기적적’으로 창설되고, 박해를 견디는 장한 모습을 기록했다. 초기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기록 가운데 대표적 사례는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들 수 있다.

 

구베아 주교는 북경에서 1790년 교황청의 포교성성 장관 안첼리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교회의 성립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1797년에 중국 스촨[四川]의 교구장이었던 동료 주교에게 조선교회에 대한 전반적 소식과 함께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에 대한 편지를 보낸 바 있었다. 이 구베아 주교의 편지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본국에 소식을 전하면서, 조선교회의 성립과 초기의 박해에 관한 일들이 ‘구대륙’ 유럽의 교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메리카에 알려진 우리 나라 교회

 

우리 나라 교회의 존재가 신대륙이었던 아메리카에 알려진 확실한 연대는 1803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아메리카에서 선교하던 교회의 지도적 인사들은 유럽 교회의 동향과 함께 당시 세계 각 지역에서 전개되던 선교의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로 부르는 지역에서 당시 선교에 종사했던 교회 지도자들도 조선교회의 존재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는 문헌 자료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활자화된 때는 1803년이었다. 이 때 「동아시아 신도들의 역경」이란 제목의 책이 멕시코 시에서 스페인어로 간행되었다. 이 책의 전체 분량은 4×6판 46쪽이다. 그 가운데 대략 30%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한국교회사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 이 언급으로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도 ‘코레아’와 ‘코레아의 교회’에 대한 정보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책이 간행된 1803년은 우리 나라에 교회가 세워진 지 불과 19년 뒤였다. 그리고 그때는 멕시코라는 나라 이름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늘의 멕시코 지역은 그때 ‘누에바 에스파냐’로 부르던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멕시코가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한 때는 이 책이 간행되고 18년이 지난 1821년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이 간행된 멕시코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중심이 되는 도시의 이름일 뿐이었다.

 

책의 저자는 마리아노 로페스 피멘텔이다.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서문을 보면, 그는 중국과 월남 그리고 우리 나라에 전파된 천주교 신앙과 그 박해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정기적으로 간행되던 「동양선교소식」을 읽고 있었으며, 프랑스어로 씌어진 중국교회 관계 자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동양을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현지의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정리하여 멕시코에서 이 책을 간행했다.

 

이 책은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주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구베아 주교의 서한은 옮겨 적혀져 1798년에 영국에 전달되었고, 1800년에 프랑스어로, 1801년에는 이탈리아어로, 1808년에 포루투갈어로 번역되어 유럽 여러 나라에서 널리 읽혔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할 때, 피멘텔은 구베아 주교가 작성한 라틴어 서한을 직접 보았거나 아니면 프랑스어나 이탈리아로 번역된 자료들을 보았으리라 추정된다. 만일 그가 라틴어 자료를 근거로 이 책을 썼다면, 이는 구베아 서한의 스페인어 역본 제작 작업과 관련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는 먼저 조선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전파되어 신자수가 4천여 명에 이르고 있음을 특기했다. 그리고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을 서술했다. 또한 주문모 신부 입국 초기에 있었던 지황, 최인길, 윤유일 등의 순교 사실을 기록했다.

 

 

남은 말

 

1803년 멕시코에서 간행된 「동아시아 신도들의 역경」은 우리 나라 교회의 존재를 아메리카 대륙에 본격적으로 알려준 최초의 책이었다. 이 책은 하나의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형제들의 연대의식을 나타내준다. 곧, 이 책의 간행은 여린 싹처럼 자라나는 우리 나라 교회에 대한 당시 세계교회의 관심이 어떠했나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피멘텔은 1801년의 처절한 박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신유박해를 겪은 이후인 1803년에 간행된 이 책에서는 조선교회가 주문모 신부와 신도들의 노력으로 순탄하게 발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조선의 교회에 하느님의 은총을 기원했다. 그의 기원은 이 책이 간행된 지 1백여 년 뒤에 이르러서야 성취되었다.

 

[경향잡지, 2002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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