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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34: 이슬람의 출현 - 지중해 막혀 동서교회 대립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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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25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4) 이슬람의 출현 - 지중해 막혀 동서교회 대립 심화

 

 

- 메카의 카바 신전을 경배중인 이슬람 신자들.

 

 

"오 마리아!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아들의 기쁜 소식을 네게 주시노라. 아기의 이름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이리니 이 세상과 다음에 오는 세상 그리고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자들로부터 영광되리라"

 

성서의 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듯한 이 말은 꾸란(코란) 3, 46의 내용이다. 이처럼 이슬람은 우리의 생각보다 그리스도교와 가깝다. 마리아의 이름도 복음서에는 19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반해 꾸란에는 34번이나 언급된다.

 

철저히 일신교를 주장하는 이슬람은 유다교를 하느님의 노여움을 산 자들의 길, 그리스도교를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의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세운 순수한 유일신 신앙을 유다교는 계시 내용을 수정했고 그리스도교는 예수와 그 제자들은 진정한 모슬렘이었으나 후대에 변질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순수 유일신 신앙이 이슬람 속에서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발생배경과 무함마드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는 고대 다신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그 의례의 중심지는 인도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대상로의 요지인 메카의 카바 성전이었다. 교역의 중심지인 메카는 교역대상국인 비잔틴과 페르시아에 접해있었으므로 자연 그리스도인들과 접촉이 있었다. 또한 인근의 메디나에는 유다인 정착촌이 있었고 500년경 쉬바국의 왕들은 유다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따라서 570년경 무함마드(마호메트)가 태어날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신은 유일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런 사람들을 하니프라고 불렀다.

 

무함마드는 메카의 유수한 부족인 쿠라이시족 하심가 출신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에 의해 양육됐다. 상업에 종사한 큰 아버지와 함께 장사를 시작한 그는 24~25세경 돈많은 과부 하디자의 장사 대리인이 돼 성공을 거둔 뒤 그녀와 결혼했다. 하디자와 결혼 후 무함마드는 종교와 인생의 근본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40세 때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부인의 사촌 와라카로부터 그 꿈이 예언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란 해몽을 들은 그는 이후 자신의 계시를 설파해나가며 일신교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메카의 검은 바위 순례를 통해 엄청난 수입을 거두던 메카의 부족들은 무함마드를 박해했고 견딜 수 없게된 무함마드는 622년 야트립으로 이주했다. 이슬람에서는 이를 히즈라(헤지라)라고 부르며 이슬람의 원년으로 삼았고 이때부터 야트립을 '예언자의 도시'란 뜻으로 메디나라고 불렀다.

 

그동안 무함마드는 자신의 활동을 계시종교인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유다인의 부정적인 태도를 보고 아브라함이 세운 최초의 유일신 신앙이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 의해 훼손 된 것이라 믿고 자신에게 계시된 내용이 진실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예루살렘을 향했던 예배 방향이 자신이 계시를 받은 메카 쪽으로 바뀌게 되고 후에 메카를 정복한후 카바의 신전을 알라의 성전으로 바꾸었다.

 

 

이슬람의 성장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후 632년 사망하자 이슬람은 그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해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644년까지 시리아, 이라크,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했고 나아가 북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711년부터는 스페인을 침입했으며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이슬람이 이처럼 짧은 시간에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것은 피정복민에 대한 관용정책에 기인한 바가 크다. 당시 이슬람은 상업과 목축업이 쇠퇴해 새로운 이주지와 무역로의 확보 등 경제적인 요인들도 정복 정책의 한 요인이 됐다. 따라서 정복지 주민이나 포로들에게 일단 개종을 권하지만 일정한 공납을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슬람의 팽창에는 격렬한 그리스도론 분쟁에 따른 그리스도교의 분열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슬람의 정복지는 주로 아리아니즘과 네스토리우스파에 의해 단성론을 주장하던 그리스도교 분파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들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강압적인 교회정책에 시달려 비잔틴에 적의를 느끼던 중 철저한 유일신을 신봉하는 이슬람의 지배를 오히려 환영했다.

 

뿐만 아니라 8세기 당시의 이슬람은 신흥종교로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의 일파쯤으로 생각한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슬람의 귀찮은 간섭과 제한 때문에 아예 개종하고 말았다. 또한 비잔틴과 페르시아제국간의 계속된 대립과 전쟁으로 양측의 힘이 쇠잔해진 것도 신흥종교인 이슬람이 그 세력을 넓혀가는데 도움이 됐다.

 

이러한 이슬람의 급속한 성장은 그리스도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옛 중심지들인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이슬람 정복 직후 40명의 주교가 있던 북아프리카 지방이 11세기 후반에는 2명의 주교만이 있을만큼 쇠퇴해졌으며 그나마 12세기 이후 그리스도교는 이 지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지중해가 가로막혀 동서교회간의 소통이 더욱 어려워지고 상호간의 화해도 무망하게 됐다.

 

정복 정책 초기 이슬람은 사막지방에서 일어난 만큼 문화적 수준이 낮아 자신들의 문화를 향상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따라서 몇가지 제한만을 제외하고 그리스도교에 관용적으로 대해왔으나 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슬람 문화가 독립할 수 있을만큼 성장하자 오히려 그리스도교 문화가 그들의 성장에 방해가 됐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관료진출이 많아져 체제유지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데다 수도원장과 주교직에 대한 부정과 투쟁, 타락한 신앙생활 등 그리스도교회의 세속화는 칼리프의 개입을 불러왔다.

 

이슬람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1009년 알 하킴이 칼리프가 됨으로써 표면화 됐는데 이때 예루살렘 성지의 교회가 파괴됐으며 이집트와 시리아 지방의 교회재산이 모두 몰수됐고 1012년부터 1014년까지의 대박해 동안에는 무려 3만을 헤아리는 교회가 불태워지고 그 자리에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는 등 암울한 상황이 계속됐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서구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가톨릭신문, 2001년 11월 25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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