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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33: 아일랜드, 영국의 포교 - 유럽 복음화에 큰 영향 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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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24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3) 아일랜드, 영국의 포교 - 유럽 복음화에 큰 영향 미쳐

 

 

- 선교 요람 : 골롬바노가 세운 이오나수도원 유적. 563년경 아일랜드의 수도자인 골롬바노는 스코틀랜드 서쪽해안의 이오나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 수도원은 7세기까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선교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교회의 중심은 런던이 아니라 대륙과 인접한 남쪽 끝인 켄터베리 대교구다. 이는 그레고리오 1세 교황에 의해 선교사로 파견된 로마 성안드레아 수도원장 아우구스티노가 자신의 대주교좌를 런던이 아닌 이곳에 세움으로써 비롯됐다. 지금도 켄터베리 대성당에는 아우구스티노 자리가 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브리타니아) 지방으로 구분되는 영국 제도의 선교가 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지역의 복음화가 유럽의 그리스도교화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스코틀랜드 교회

 

아일랜드 지방의 복음화는 오늘날 아일랜드의 주보 성인으로 추앙받는 파트리시오 성인에 의해 이뤄졌다.

 

385년경 브리타니아에서 태어난 성인은 16세때 해적들에 의해 납치돼 아일랜드에 노예로 팔려가 6년간의 노예생활을 했다. 이후 아일랜드를 탈출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한 성인은 팔라디오스의 후임으로 아일랜드 주교에 임명돼 포교주교로 활동했다.

 

수도생활에 애착을 가진 파트리시오에 의해 복음화된 아일랜드 교회는 자연 수도원 중심의 교회로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수도생활적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6세기부터 수많은 수도원이 설립되면서 번영하였고 수도원이 교회행정의 중심이 돼 수도원 총장이 관할하는 수도원 중심의 교구가 창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도는 후에 수도회 면속구로 발전하게 된다.

 

아일랜드의 수도원은 행정중심일 뿐만 아니라 고등교육기관의 역할까지 담당하여 많은 성인과 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후에 아일랜드를 성인들의 섬, 박사들의 섬으로 불리게 했다.

 

이러한 아일랜드에서의 수도생활적 신앙관습은 유럽대륙에까지 널리 퍼지게 된다. 그중에서도 속죄규정과 관련해 수도원에서 발달한 사적고해가 일반 평신도들에게까지 전달돼 유럽교회의 신앙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 교회는 대죄가 있을 경우 공개적인 속죄(그것도 일생에 한번)밖에 없었고 속죄가 끝난 다음에 교회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즉시 사죄될 수 있었고 은밀한 마음의 죄에 대해서까지 영성지도를 받을 수 있었던 이러한 사적고해가 평신도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자 사람들은 영성체 전에 고해성사를 받기에 이르렀고 이를 위해 아일랜드에서는 유명한 '속죄규정서'(Penitentiales)가 나왔다. 이 규정서는 7세기 이후 서구의 모든 성직자들이 직무상 지니고 다녀야 했다. 각종 죄에 대한 속죄규정을 정한 이 속죄규정서에 따르면 물건을 훔친 경우 보상후 평신도는 40일, 성직자는 1년, 수도자는 1년6개월간 빵과 물만 먹고 생활해야 했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열성적인 영성생활은 대륙의 교회, 특히 집단 개종한 프랑크 왕국 등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보였고 영국 수도자들의 대륙선교와 함께 유럽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브리타니아, 앵글로 색슨 교회

 

요오크, 런던의 주교들이 314년에 있었던 아를스 교회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브리타니아에는 이미 로마제국 시대에 교회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407년 로마가 철수하자 픽트, 앵글로, 색슨 등 게르만 족들이 침입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을 웨일스 지방이나 대륙으로 쫓아내고 7왕국을 건설했다.

 

이곳에 대한 선교는 무엇보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에 의해 이뤄졌는데 교황은 596년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40명의 수도사들을 이곳에 파견했다.

 

그리고 첫 선교의 결과는 대단한 것이어서 597년 성탄축일날 아우구스티노는 켄트의 에델베르트 왕과 1만명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다. 이처럼 선교가 큰 성공을 거두자 교황은 계속 선교단을 증원해 보냈으며 601년에 12개 교구로 구성된 두 개의 관구를 설정하고 켄터베리를 수좌교구로 정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수도사 파견은 수도회 역사와 선교사에 있어 일대 전환점을 이룬 계기가 됐다. 교황은 수도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수도생활과 사목생활의 융합이라는 예전의 수도생활과 다른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선교방법에 있어서도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일방통행식 복음의 강요보다 뛰어난 적응성을 가지고 기존 관습들을 복음적으로 완성하도록 이끌었다. 신앙은 하나이지만 신앙실천을 위한 전례 등의 방식에서 교황은 "높은 산을 오르려는 사람은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한 발짝 서서히 오르는 것"이라며 신앙의 토착화를 강조했다.

 

 

대륙포교

 

아일랜드와 앵글로 색슨 교회의 수도자들은 고행실천의 하나로 하느님을 위한 순례여행을 했다. 속죄행위이자 특별한 희생으로 실시된 순례여행은 영국교회의 높은 영성생활을 유럽대륙으로 확대 시켰고 결국 수도자들이 순례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에 나서게 했다.

 

골롬바노 등 아일랜드 수도사들의 선교활동은 유럽, 특히 독일과 골지방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의 선교사업은 조직적이거나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수행의 차원에서 평민들을 대상으로 이뤄졌고 무엇보다 로마교회와 항구적인 관계를 맺지 못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반면 앵글로 색슨 수도자들은 선교방법이 완전히 달랐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으며 교황과 결속된 상태에서 프랑크 왕국의 지도층을 상대로 적응력 있게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유럽대륙에서의 포교활동은 동로마에서 상실된 교황의 권위와 영향력을 서구에서 회복시켜 주는 발판이 됐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사도 보니파시오를 위시한 앵글로 색슨계 수도사들의 선교활동은 영방교회로 전락한 프랑크 교회를 보편사상으로 귀의시키고 개혁시킴으로써 교황직과 프랑크 왕국과의 동맹을 이뤄내는 초석이 됐다.

 

대륙으로부터 복음을 전래 받아 충실한 신앙생활로 대륙교회를 감화시키고 포교한 앵글로 색슨 교회의 모범은 중국으로부터 신앙을 전래 받아 아시아 선교의 핵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한국교회의 역사와 닮은꼴이다. 그리고 이런 위치에 선 제3천년기 한국교회의 나갈 방향은 당시 영국교회의 열성적인 신앙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11월 11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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