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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26: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선교와 개혁 - 미래 교회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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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17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26)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선교와 개혁 - 고대의 위기 위에 미래 교회 건립

 

 

- 로마의 유적 : 로마의 멸망을 보고 사람들은 절망했으나 로마를 멸망시킨 이민족들을 개종시킨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활약으로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중세사회를 만드는 토양을 만들었다.

 

 

[로마=김상재 기자] 주후 410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영원한 도시 로마가 게르만 부족인 서(西)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천도이래 제국의 정치적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지만 로마는 아직도 제국의 상징적 도시였고 서방 교회의 중심이었다. 로마의 이러한 재난은 제국을 혼란에 빠트렸고 많은 이교도들은 로마의 재앙이 로마의 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주장을 거슬러 '하느님의 도시(신국론)'를 저술해 로마의 재앙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시키려 하기도 했다.

 

410년 로마의 함락이래 서로마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439년 반달족에 의해 북아프리카가 점령당했고 452년 훈족의 침입, 455년 반달족의 로마약탈, 476년 고트족에 의한 서방의 마지막 황제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 등 혼돈의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혼돈은 꺼져가는 한 시대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암울한 시대의 삭풍을 맞으면서도 과거를 부정시키지 않고 다음시대의 영광을 여는 등대가 되어준 것은 바로 교회였다. 교회는 침입자들과의 담판을 통해 파괴를 막았고 약탈과 전염병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구호금을 지급하는 한편 야만족들에 의해 파괴된 학교들을 대신해 교육도 담당했으며 거룩한 전례를 통해 황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교회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로마제국의 지원을 대신해 서방세계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탱해주는 유일한 기관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무너져 가는 서방사회에서 높은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됐다. 특히 이 시기에 뛰어난 교황들의 활약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됐고 동시에 교황권의 강화라는 시대적 부산물을 낳았다.

 

그 활약의 와중에서도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던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업적은 지대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서방교회의 4대교부중 한 명이기도한 그레고리오 교황을 대교황으로 부르고 있다.

 

 

수도자 출신 첫 교황

 

그레고리오는 540년 로마의 명문귀족이었으며 이미 펠릭스 3세와 아가삐또 1세 두 교황을 배출한 아니키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귀족계층의 고등교육을 받은 그레고리오는 이미 33세가 되던 573년 최고위층인 로마 집정관에 선출됐다. 그러나 575년 부친의 사망후 그레고리오는 장래가 보장된 화려한 세속생활을 청산하고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던 집을 베네딕도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어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시칠리아의 상속토지에도 6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578년에는 베네딕도 1세로부터 부제로 서품되었고 이듬해에는 펠라지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황사절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586년에야 로마로 돌아온 그는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갔으나 590년 펠라지오 2세가 선종하자 자신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로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됐다.

 

 

선교와 개혁

 

당시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과 5~6세기에 창궐한 전염병과 페스트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따라서 교황에 착좌한 그레고리오는 먼저 굶주리는 시민들을 위해 식량과 필수품을 장만하는데 주력했고 이를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북아프리카 등지에 산재해있던 교황청의 재산을 정비했다. 그의 이러한 교황청의 부동산 재정비는 나중에 교황령의 기초가 되고 중세 시기 교황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교황은 자선사업 뿐만 아니라 서구사회의 지도자로서 농부들에 대한 대지주들의 착취를 막았고 랑고바르드족이 592년 로마를 포위했을 때 담판으로 그들을 물리치는 등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수호에도 나섰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동로마제국 황제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교황은 교회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야만족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문명화 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프랑크왕국과 우호관계를 설립하고 대대적인 선교정책을 실시해 안드레아 수도원장 아우구스티노를 영국으로 파견했다. 또한 아리우스교도들인 랑고바르드족들의 개종 등 게르만 민족들의 개종과 게르만 교회와의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정책들은 앞으로 게르만 민족들이 지니게될 서구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꿰뚫어본 선견지명으로 '그리스도교적 중세 서양'을 탄생시키는 토양이 됐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러한 혜안은 고대의 폐허 위에 미래의 교회를 건립한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불리게 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회의 공적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만큼이나 교회쇄신을 위해서도 열과 성을 다했다.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기 위해 사목지침서(Liber regular pastoralis)를 저술했다. 사목직무를 받는 동기, 사목자들이 지녀야 할 덕목, 교리교수법 등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중세기 동안 사제양성의 기초가 됐다.

 

이와함께 수덕적인 그리스도교 생활을 강조해 욥의 윤리를 저술하기도 했다. 욥기를 신학적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중세기의 윤리신학과 수덕신학의 기초를 놓은 보고가 됐다. 또한 수도생활을 촉진시켜 많은 수도원을 건축하는 한편 선교와 개혁에 수도사들을 첨병으로 삼았다.

 

또한 성직이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으로 생각한 그레고리오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세계교회의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하자 이에 반대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하느님 종들 중의 종'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이 표현은 로마주교들이 가장 즐겨사용하는 표현이 됐다.

 

그레고리오는 전례분야에서도 당시 미사를 개혁하고 미사전문을 오늘의 형식으로 만들었다. 각 지방에서 제각기 불려지던 성가들을 재정리해 전례와 전례력에 알맞게 맞추었다.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허약한 건강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한 신심깊은 수도자요 탁월한 정치가였던 그레고리오 교황의 14년간의 재위는 역사적 전환기에 새로운 미래를 개척한 위대한 시간으로 세계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5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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