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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14: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 - 철학적 언어 · 형식 빌어 복음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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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3 ㅣ No.205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14)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 - 철학적 언어 · 형식 빌어 복음전파

 

 

초대교회 당시에는 로마와 더불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큰 국제적인 도시였다.

 

이중에서 알렉산드리아(현지명=알리스칸드리아)는 기원전 331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이름을 따서 나일강 하구와 지중해가 만나는 곳에 세운 도시로 지금도 수도 카이로 다음가는 제2의 도시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이집트 프톨레마이이오스 왕가의 수도가 됐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세대륙이 만나는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경제의 중심도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 클레오파트라의 고향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에는 지난 96년부터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가 복원을 추진 중인 70만개의 파피루스 뭉치를 소장한 고대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일찍부터 문화와 학문이 꽃 피웠던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했는데 기원전 2세기에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들을 위해 구약성서가 희랍어로 번역돼 70인역(septuaginta)이 출판돼기도 했다.

 

이러한 히브리 사상과 희랍사상의 교류가 일찍부터 이루어져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토양이 충분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이러한 사상적 토양은 알렉산드리아를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만들게 된다.

 

 

교리학교의 시작

 

알렉산드리아는 교회 초기부터 복음이 전해져 교회공동체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교회전승에 의하면 마르꼬 복음사가가 이 곳에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지며 영지주의적 이단 집단들도 흥행했다.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는 2세기경 왕성한 선교활동으로 매일같이 사람들이 입교해옴으로써 특별한 세례지원제도 같은 것이 필요하게 됐다.

 

또한 세례지원자들 뿐 아니라 이들을 가르칠 교리교사들을 위한 수준 높은 신학교육과 교리를 가르칠 양성소 즉 교리학교가 필요하게 된 것인데 사가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는 이미 2세기에 이런 교리학교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는 판테누스가 설립자로 알려져 있는데 희랍철학의 방법에 따라 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상을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로 희랍철학을 꽃피웠던 도시였으므로 신학과의 만남도 자연스레 희랍사상 안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판테누스는 철학강의의 일환으로 복음을 강의했고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뛰어난 제자들도 철학의 언어와 형식을 빌어 복음을 전달했다.

 

또한 성서를 문자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그 속에 숨겨진 영적이고 신비적 의미를 밝혀내는 은유적 방법으로 해석해 이교문화를 수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교학문을 거쳐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학풍은 후대 특히 개신교도들에게는 이단으로 몰릴만큼 '지난친 적응으로 인한 순수한 복음의 변질이라는 문제를 낳기도 했다.

 

 

끌레멘스와 오리제네스

 

오리제네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가 배출한 대표적 인물인 끌레멘스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가능한 쉽게 이교인들의 고유한 사고를 통해 올바른 방법으로 진리에 대한 신앙에 도달하도록 이교인들에게 익숙한 것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저서 양탄자(stromata)에서 밝히고 있다.

 

아테네의 이교 가정에서 태어난 끌레멘스는 시칠리아와 팔레스티나 등지를 돌며 공부를 하다 18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판테누스를 만나 그리스도교에 입교하게 된다.

 

이런 끌레멘스에게 있어 신앙과 이교 철학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모든 학문은 신학에 도움을 주고 그리스도교는 모든 이교학문의 꽃(영광이며 화환)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끌레멘스에게 있어 이교철학과 그리스도교와의 이런 조화는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 이성안에 역사하신다는 로고스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끌레멘스 신학의 출발점인 로고스는 세상의 창조주이며 계시자로 마지막에 친히 인간육신을 취하여 강림하신 분으로 모든 이성적 활동의 주재자이시기 때문에 이교 철학과 신앙 사이의 조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한편 끌레멘의 제자인 오리제네스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중 한명으로 천재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순교할 만큼 독실한 알렉산드리아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오리제네스는 가르친 바를 실천했고 실천한 바를 가르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모방하려고 했을만큼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오리제네스는 로고스에 기반을 둔 스승 끌레멘스의 사상에서 한발 더 나아가 모든 것의 중심을 하느님에게 두면서 자신의 신학을 펼치고 있다.

 

오리제네스에게 있어 하느님은 영이며. 낳음을 받지 않은 분이며 물질계를 초월한 위격적 존재로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돌보고 계신다는 것이 그의 사상적 중심이다.

 

따라서 오리제네스에게 있어 하느님은 인간에게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분이시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알려짐으로써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본체 및 존재의 완전한 표상인 것이다.

 

네치우스 황제 박해때 투옥돼 고문을 당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253년 선종한 오리제네스는 생전에 엄청난 수의 저서들을 남겼지만 시기와 질투로 고통을 겪었고 사후에도 몇가지 학설 때문에 수세기를 두고 소위 '오리제네스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신학논쟁은 동방교회의 신학을 엄청나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로마가 패배자 마저도 로마화 시키는 방식으로 세계를 제패한것 처럼 알렉산드리아는 이교학문 마저도 하느님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 초대교회 최고의 중요 거점도시가 됐으나 이제는 또다시 교회유적이라곤 까타콤바 정도만이 남아있는 이교인의 도시가 됐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18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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