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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13: 교부들의 황금기 - 언행일치의 삶 오늘에도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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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3 ㅣ No.204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13) 교부들의 황금기 - ‘언행일치의 삶’ 오늘에도 모범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280㎞, 차로 4시간을 달리면 가빠도기아라고 하는 고원지대가 나타난다.

 

이 곳은 주후 17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속주가 된 가빠도기아 왕국이 있던 곳이다.

 

가빠도기아 곳곳에는 3천개가 넘는 동굴 성당이 있어 이 지역을 찾는 순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수도원 집성촌인 괴레메 지역이 가장 유명하다.

 

‘너희가 찾지 못하는 곳’이란 뜻의 괴레메의 바위산들에는 수많은 동굴성당과 수도원이 조성돼있는데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매일 한 성당에서 1번씩 돌아가며 1년간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365개의 성당이 조성 돼 있다고 한다.

 

이 동굴성당의 내부 벽에는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듯 마모되고 이교들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지만 수도자들이 불타는 신심으로 그린 프레스코화가 남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실리우스 성당이다.

 

가빠도기아 왕국의 수도였던 가이사리아(현지명=카이세리)의 주교였던 바실리우스는 동생인 니싸의 주교 그레고리우스와 나지안조 주교였던 그레고리우스와 더불어 가빠도기아의 삼총사 교부로 불린다.

 

이 가빠도기아의 삼총사 교부들은 이전 시대의 호교 교부들이 이교도적 상황에 맞서 교회를 옹호하던 것에서 나아가 신앙의 유산들(信仰財)를 보다 깊게 신학적으로 이끌었던 교부들의 전성기 시대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정통교리의 확정

 

2세기말부터 여러지역 교회에서 중요한 교부들과 저술가들이 거의 동시에 나타나 신학의 기초를 놓게 되는데 이 시기는 그리스도교 복음이 그리스, 로마 문화에 정착되는 시기다.

 

따라서 복음이 이들 문화권 안에서 일종의 토착화 과정을 거치는데 희랍철학과의 만남은 그리스도교를 하느님의 계시로 보지않고 단순히 이성적 지식(그노시스) 만으로 오해되는 징후가 농후했다.

 

그노시스 이단들은 이미 우주창조와 구원 등에 대한 성서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즐겨 사용했다.

 

그래서 당시 교회 지도자들 즉,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신앙 및 계시의 원천들을 정확히 규정하고 정전 성서를 확정하는 한편 그 해석을 사도들의 계승을 통하여 보증된 주교에게 유보하는 것이 필요하게 됐다.

 

이단자들의 자의적 해석에 대해 사도성전의 정신에서 신앙을 이해하는 것 만이 그리스도교적 그노시스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노시스 및 기타 이단과의 대결에서 학술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하게 되고 공의회들을 통해 정통교리가 확정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교부학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교부들 대부분이 이 시대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희랍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에서는 아타나시오, 가빠도기아 삼총사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요한 크리소스토모 등이 있고 라틴아를 사용하는 서방교회에서는 힐라리우스, 암브로시우스, 레오1세 대교황,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속한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지리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신학적 경향도 차이를 보이는데 서방교회에서는 교회론과 성사론이 발전됐고 동방교회에서는 성삼론과 그리스도론이 크게 발전했다.

 

 

교부가 되는 조건

 

원래 주교들에게만 붙여졌던 교부란 명칭은 4세기 후반 여러 이단 논쟁이 있을 때 교회의 정통교리를 증언하는 주교는 물론 신부 학자들도 포함해 교부라고 부르기 시작 했다.

 

‘하나의 교회의 신앙과 일치’ 안에서 각종 문제들을 판단하고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의 스승인 교부라고 부른 것이다.

 

이렇게 사도들의 설교 내용을 가르치고 증언한다는 의미에서 교부들은 교회 신앙의 증거자로 여겨지게 됐고 따라서 새로운 교리가 등장했을 때 그것이 교부들의 가르침인지 비교해보아 위배되는 사항이 있으면 배척되는 이유가 됐다.

 

이렇게 이단 앞에서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정확한 표현으로 그르침없이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교부들에 있어 신학과 영성생활은 구별되지 않았다.

 

교부들의 신학적 성취는 학술적 흥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목자의 입장에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영성생활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교부 스스로도 빼어난 수덕생활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신학을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교부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개념에 따라 교회는 4가지 기준을 구비한 사람들을 교부라 한다.

 

첫째 그 가르침이 사도들의 설교에 부합하는 정통성이 있어야 하고(정통교리) 둘째 사도들의 시기에 가까운 분들이다.(고대성: 95년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저술한 로마의 글레멘스에서 부터 동방교회는 요한 마미쉐노, 서방교회는 그레고리오 대교황까지)

 

셋째는 생활이 모범적인 분들로 가르침과 실제생활 사이의 조화와 신앙과 윤리적 생활 사이에 조화를 이루면서 교회생활에 충실했던 분들(거룩한 생활)이며 넷째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인정해온 분(교회의 인정)이어야 한다.

 

가르침과 생활의 일치를 이루어낸 교부들의 모범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연 우리는 자신이 알고있는 신앙에 대해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실천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가빠도기아 바실리우스 동굴성당의 조악한 프레스코화가 준 이미지였다.

 

교부들은 죽어서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11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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