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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12: 초기 그리스도교 호교가 - 시민에게 유익한 종교임을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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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3 ㅣ No.203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12) 초기 그리스도교 호교가 - 시민의 복지 생각하는 유익한 종교임을 설득

 

 

호교교부 시대의 상황

 

교회사의 시계추가 2세기 중반에 이르면 성공적인 선교활동으로 교회 공동체가 날로 성장한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은 새로운 문화권, 이질적 세상과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로마 제국의 박해도 갈수록 심화된다.

 

다신교 국가인 로마제국에서 하느님만이 유일신으로 다른 신들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이교도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됐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황제 신격화를 거부해 반정부 집단으로 취급됐다.

 

또한 급격한 교세의 확장에 놀란 로마제국은 체제에 대한 불안과 위협을 느낀 나머지 마르쿠그 아우렐리우스 황제같은 권력자나 첼수스 및 루치아누스 같은 지식층이 그리스도교를 반박하고 지속적으로 박해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외에도 교회 구성원 대부분이 하층 계급으로 구성돼 있어 저질 신흥 종교라는 비웃음을 샀을뿐 아니라 박해를 피해 비밀리에 모여 성찬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두고 근친상간 혹은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종이라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로부터도 비난과 공격을 받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호교교부란

 

이러한 반교회적 이교도적 상황에 맞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교회를 옹호하고 변론하는데 교회의 역량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교회 초기 사도교부들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지도 교육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교회의 자기방어 및 옹호 자기 변론의 호교적 요소가 2세기 교회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교회 지도자들 및 저술가들을 호교교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광신과 미신으로 매도 당하는 입장에서 호교교부들은 로마제국과 그리스도교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조목조목 반박한다.

 

호교교부들은 교회를 변론하는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3가지 중요논점을 펼쳤다.

 

첫째, 교회를 국가의 위험요소로 보는 이들에게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것을 촉구하면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에 위험요소가 아니며 신앙은 모든 시민들의 복지를 생각하므로 세상을 위한 유익한 종교요 올바른 기존 질서를 수호하는 원동력이므로 합법적인 근거없이 충실한 시민을 박해하지 말라는 것.

 

둘째, 이교사상과 그들의 우상, 미신, 신화에 대한 모순과 부도덕성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올바른 신관 즉 하느님의 유일신 사상의 우월성을 설파하면서 하느님의 초월성과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 육신의 부활 등에 대한 교리를 강조한다.

 

세째로는 철학의 이론적 방법 즉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일깨우며 인간의 한계성을 지적하며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철학과 사상을 뛰어넘는 신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교야 말로 참다운 학문(신적 철학)이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호교교부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소개하는 데 그친 사도교부들과 달리 비록 투박하지만 이론적으로 신앙을 설명하면서 신학의 기틀을 마련해 최초의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호교교부들

 

호교교부들은 희랍문화권에서 개종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교를 소개하는데 있어 변증법, 대화론, 수사학 등 희랍철학 방식을 도입, 응용하여 그리스도교화 시키고 있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교를 희랍화 시킴으로서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부들은 이교도들과 대항해 그들의 말과 표현양식을 사용해 그리스도교를 설명했지만 교리자체를 변질 시키진 않았다.

 

오히려 당시 로마제국의 대중언어였던 희랍어와 그 표현양식을 사용함으로써 신앙을 모든 계층에 전파할 수 있는 길을 터놓은 셈이다.

 

열정적이었던 호교교부들의 신앙과 해박했던 그들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일련의 토착화 과정을 거쳐 그리스·로마 문화에 정착되는데 있어 초석을 세웠다. 이 토착화 과정에 따르게 돼있는 이단과 분열에 맞서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다음세기 본격적인 신학을 펼치는 교부들의 황금기를 여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호교교부들에는 과드라뚜스, 아리스티데스, 아리스톤, 아테나고라스, 타시아누스, 유스티누스, 테오필루스, 헤르미아스 등이 있다.

 

이중에서도 2세기 대표적 호교가는 현재 대구 신학교의 주보성인인 유스티누스다.

 

이교가정에서 태어난 유스티누스는 희랍식 교육을 받아 깊은 철학 지식을 습득했고 이러한 학문적 자세로 진리를 탐구했다.

 

유스티누스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플라톤 사상에 연이어 몰두했지만 끝내 하느님 존재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느끼던 중 체사리아의 바닷가에서 한 노인을 만나 인간의 모든 사상은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교로 귀의하게 됐다.

 

이때가 130년 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때부터 유스티누스는 평신도이지만 진리의 설파자, 신앙의 설교가로 나서 위대한 교회의 스승이 됐다.

 

유스티누스는 자신의 회개와 관련하여 "플라톤 학파의 제자였을 때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었는데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용감한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이나 탐욕 가운데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면서 순교자들의 행동에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순교자들에 받은 감동을 가슴에 품고 회개한 유스티누스는 165년경 자신이 순교할 때까지 생앵의 절반을 로마에 머무르면서 자기 집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복음을 전하는 한편 박해자들에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을 남겼다.

 

평신도의 신분으로 교회를 위해 온 몸을 열정적으로 불사른 유스티누스의 귀감은 정초가 되면 심심풀이를 핑계로 토정비결을 보고 오늘의 운세에 한탄하며 때마다 궁합이니 택일이니 가리지 않는 타협적인 신앙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얼마나 좋은 보물을 가졌는 지 알지 못하면 그 보물은 남의 것이 되고 만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4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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