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자료

2011-0130.....연중 4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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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01-29 ㅣ No.986

연중 제 4 주일 ( 가해 )
스바니야 2,3; 3,12-13 1코린 1,26-31 마태 5,1-12
2011. 1. 30 등촌3
주제 : 하느님의 행복에 함께 하려면.....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물어봐도, 가장 바라는 것은 행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라는 것을 누구나 똑같이 행복이라고 말을 해도, 사람들은 저마다 그 행복을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설명이 다를 것입니다. 아픈 사람이라면 건강에서 행복이 시작된다고 할 것이고, 돈이 없어서 곤경을 겪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행복의 시작을 돈에서부터 생각할 것입니다. 다른 말들도 가능하겠지요. 사람이 모이면 모이는 만큼, 그러한 질문을 한다면 그 질문을 듣는 사람의 수만큼 대답의 방향은 달라질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 행복에 대해서 물으면, 여러분은 대답을 어느 입장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까? 이 질문에는 누구나 똑같이 대답해야 하는 정답은 물론 없습니다.
 
오늘은 연중 4주일입니다.
올 한해도 시작한지 벌써, 30일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은 듯한데, 벌써 30인가 하는 소리를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현실 삶에 안타까운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힘겨운 사람이라면, 그렇게 흐르는 시간이나 날짜에 대한 감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신앙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향인 신앙인이나, 세상의 것을 먼저 생각할 사람들이나 세상에서 듣는 질문은 똑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질문에 대답의 방향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 삶에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여덟가지 행복, 진복팔단에 대한 말씀입니다. 군중을 보신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랄법한 것들, 그 자리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다양한 목적들을 뒤로 하고, 다짜고짜 행복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말씀이 그들이 갖고 있었던 마음을 읽은 것이었을까요? 그들이 삶에서 알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하던 것을 채워주시는 수단이었을까요? 판단은 저마다 다르겠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을 마태오복음사가는 8가지로 구별하여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을 전하는 루카복음에는 행복에 관한 것이 4가지, 불행에 대한 것이 4가지로 구별하여 나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것을 중심으로 함께 묵상할 순서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내용들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음이 가나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뜻이 옳다는 전제에서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셨지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을지 몰라도 그와는 다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뜻에 일치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보다 더 훌륭하고 좋은 생각(?)을 한다면, 그런 생각과 자세에 맞는 행복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초점은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말씀인 앞부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전제조건으로 하시는 말씀의 입장에 처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행복에 가깝게 갈 수 있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다가올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자신이 원하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를 자기 주변에 더 많이 쌓고 그것을 즐기고 지키려는 사람이 되느냐가 한 가지 가능성이고, 두 번째 가능성은 현재까지 본인이 행복의 요소라고 생각했던 이제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잃어버리는 일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지속되기가 어렵다고 할 것이고, 두 번째 가능성은 누구도 받아들이기 싫은 상황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의 방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입장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선포나 바오로 사도가 하시는 말씀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사람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법규를 올바른 태도로 대하고 그 법규를 겸손하게 대하는 것이 주님의 분노를 피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 것이라는 선언이 스바니야 예언자의 선포입니다.
 
또한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응답하던 순간을 기억하라는 것이 바오로사도의 부탁입니다. 내가 세상의 입장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던 때,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적용하여 나를 선택해주셨으니 내 본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것이 바오로사도의 선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언자나 사도의 말씀을 반복해서 듣더라도, 정말로 그러한 사람으로 바뀔 것인지는 개인적인 문제에 속한다고 주장하기 쉽습니다. 그러하다면, 당연히 내게 실현되는 하느님의 행복도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마는 잘못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당신의 뜻을 선포하고 실현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바르게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마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잠시 묵상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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