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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근대 교육의 출현과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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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5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근대 교육의 출현과 천주교

 

 

해마다 12월이면 대학입시가 시작된다. 대학입시는 수험생을 둔 학부모에게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 대학입시는 근대 교육의 산물이다. 물론 옛날에도 과거제도와 같은 시험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20세를 바라보는 온 나라의 청년들이 신분이나 지역을 떠나 한결같이 대학입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대학입시는 제도 교육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제도 교육은 근대 교육이 가지고 있는 한 특성이다. 우리 나라의 근대 교육은 개항기(1876-1910년)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근대 교육기관을 우리 나라 최초로 설립했다. 입시철인 이 달에는 우리 근대 교육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박해시대 천주교 교육

 

우리 나라에서 천주교 신앙은 전통적 가치관을 파괴하고 새로운 근대적 가치관을 제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물론 18세기 말 이래 유럽에서 천주교 신앙은 전근대적 가치체계의 일환으로 비판되기도 했고, 근대를 추구하던 이들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은 유럽에서와는 달리 기존 체제와 가치에 대한 도전 현상의 하나였다. 여기에서 한국 천주교 신앙은 18-19세기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근대를 지향하던 사조가 되었다. 이 측면에서 천주교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근대 교육이 출현하게 된 사실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우리 나라 천주교회는 박해의 와중에서도 1855년 강원도 배론에 신학교를 세워 성직자 양성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1866년에 일어난 박해로 말미암아 단 한 명의 신부도 배출하지 못한 채 폐교되었다. 한편, 1865년에는 베르뇌(Berneux) 주교의 지시를 받아 이덕보(李德甫)가 서울에 학교를 세워 신도와 일반 학동들에 대한 교육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학교도 박해로 창설 다음해에 문을 닫았다. 그리하여 이 교육기관들이 근대적 교육을 수행하는 본격적인 제도 교육 기관으로 성장해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는 신자들에 대한 일종의 비정규적 종교교육을 통해서 일종의 사회교육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박해시대 교회는 교회서적을 읽히려고 ‘회장’들에게 문맹 신자들에 대한 한글교육의 의무를 부과했다. 이로써 교회는 문자 해득률의 향상에 기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관을 심어주어 인간 상호관계에 대한 근대적 인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이는 한국 사상사 내지는 한국 교육사에서 천주교회가 발휘하고 있던 긍정적 기능으로 볼 수 있다.

 

 

인현서당 개교의 배경

 

조선왕조는 1876년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사회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개항기 이후 우리 나라 사회에서는 개화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학문을 장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의 신교육이 싹텄다. 그 결과 동문학(1883년), 광혜원(1885년), 육영공원(1886년), 일어학교(1891년) 등 관립학교가 세워졌다.

 

또한 관립학교의 설립에 앞서 1883년에는 원산학사가 세워져 한국 근대 교육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주장된다. 개신교 선교사들도 배제학당(1885년), 이화학당(1886년), 정동의 학당(1886년) 등을 세워 신교육에 착수했다. 이들 학교의 학생수는 별로 많지 않았다. 1885년 배제학당은 4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고, 1885년 이화학당은 1명의 학생으로 개교했다. 1900년을 전후하여 전라도 전주에서 개교한 신흥학교도 1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이 학교들은 시작은 겨자씨 같았으나 그 열매는 풍성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천주교회에 신앙의 자유가 공인된 때는 1895년이었다. 그러나 이미 1882년경부터는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고 있었다. 개항 직후부터 일부 지방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약화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짝하여 교회는 학교를 세워 제도 교육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곧 조선에 나와서 선교하던 로베르(Robert) 신부는 1877년 황해도 배천에서 학동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에는 3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가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곧 폐교되었다. 한편, 개항기 조선교구의 주교는 일반 교육기관과 신학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조선교회는 신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주변 여건을 갖추어갔다. 그 결과 1882년에는 ‘인현서당(仁峴書堂)’이 서울에 세워졌고, 1885년 교회는 여주 부엉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를 설치하여 신학교육을 다시 시작했다.

 

 

최초의 근대학교 인현서당

 

개항기 천주교회가 세운 인현서당과 ‘예수 성심 신학교’ 가운데 일반 교육운동의 차원에서 보자면 인현서당의 존재가 주목된다. 개항기 천주교의 교세통계를 보면 인현서당은 1882년 설립되었다. 이 학교의 명칭은 학교가 자리잡은 ‘인성붓재(仁峴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오늘날 서울 중구 인현동 중부경찰서 부근으로 짐작된다. 그뒤 이 학교는 종현으로 옮김에 따라 ‘종현서당’, ‘계성학교’ 등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 계성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이 학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주장되던 원산학사보다 1년을 앞서 개교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학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개교 당시 이 학교의 한국식 명칭은 ‘학교’라는 말과는 달리 ‘서당’이었다. ‘서당’은 전근대 사회의 비정규적 한문 교육기관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러나 인현서당의 프랑스어 표기는 학교(college)로 되어있어, 이를 제도교육 기관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사실, ‘학교’라는 용어가 법제적으로 확정된 때는 인현서당이 개교한 13년 뒤인 1895년이었다. 그 이전 학교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서당, 학당, 학, 의숙, 공원, 학원, 학사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러므로 인현서당에서 드러나는 ‘서당’이란 명칭만 가지고 이곳이 근대 교육기관과는 전혀 무관한 전통적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학교에서는 영세자, 고해자 등의 통계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 이 학교는 선교를 목적으로 한 학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82년 개교 당시 이 학교의 전체 학생수가 얼마인지는 미상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신도학생이 11명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이 학교의 학생수는 개교 당시에 최소한 11명 이상이었다. 그리고 개교 이듬해인 1883년에는 최소한 29명의 학생이 있었다. 이와 같은 학생수는 당시의 일반 학교들과 비교해 보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통계는 이 학교가 일반 학생들까지 수용하고 있던 본격적인 제도교육 기관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남은 말

 

오늘날 한국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자원으로는 교육받은 인재들을 들고 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교육을 중요시해 왔고, 교육받은 사람들을 선비로 존중해 왔다. 이는 우리의 전통 가운데 유교문화가 남겨준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당시 조선에서는 유학의 한 갈래인 성리학이 성행하고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교육은 성리학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근대적 교육은 성리학적 교육과는 다른 철학과 방법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했다. 여기에서 박해시대 이후 가톨릭 교육이 가질 수 있었던 반(反)성리학적 특성이 근대 교육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그리고 천주교회는 ‘인현서당’과 같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해서 운영하게 되었다.

 

[경향잡지, 2001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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