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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42: 그레고리오 개혁과 서임권 논쟁 - 평신도의 성직 임명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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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33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2) 그레고리오 개혁과 서임권 논쟁 - 평신도의 성직 임명 금지 선포

 

 

- 카놋사의 성 : 이 성문 앞에서 하인리히 4세 황제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게 자신의 주교 서임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1077년 1월 28일, 이탈리아 북부 카놋사의 성문 앞.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독일의 하인리히 4세 황제가 화려한 황제복 대신 참회복을 입고 3일째 맨발로 눈밭에 서있었다. 성직자 서임과 관련해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며 파문을 철회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놋사의 굴욕'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 사건은 11~12세기 성직 서임권을 둘러싼 교황권과 세속권력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황제들과 제후들이 자신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임명하는 이른바 '평신도에 의한 성직 서임'은 2중의 큰 폐단을 가져왔다. 첫째는 성직의 매매였고 둘째는 독신생활에 대한 규율의 문란이다. 교회는 이런 폐단에 맞서 개혁교황들을 중심으로 세속권력에서 교회를 구출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따라서 이 싸움은 표면적으로는 성직 서임 권리가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었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리스도교의 독립에 관한 것이었고 나아가 중세 그리스도교 문명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이러한 교회 개혁의 불을 당긴 것은 카롤링거 왕조의 멸망 이후 180여년에 이르는 교황권의 쇠퇴기에 종지부를 찍는 레오 9세 교황이었다. 레오 9세는 즉위한 1049년 4월 로마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성직매매를 한 주교를 파문하고 성직매매로 신부가 된 이들에게도 40일간의 참회를 요구해 12세기 교황권의 전성시대를 여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어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후임으로 네살의 어린 하인리히 4세가 등극하자 성직 서임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니콜라오 2세는 교황권의 독립을 위해 1059년 라테란 교회회의에서 교황 선거권을 추기경만으로 제한하는 교령을 반포하고 교황선거의 안전한 실시를 위해 이탈리아 남부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노르만족과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교황선거에 대한 속권의 개입을 막고 교황청은 교회개혁의 전제 조건인 독립권을 회복했다.

 

1073년 알렉산데르 2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레고리오 6세부터 7대에 걸쳐 교황을 보좌하며 교회 개혁파의 거두로 떠오른 힐데브란트가 만장일치로 교황에 추대되어 그레고리오 7세란 이름으로 교황이 됐다. 이때 독일의 하인리히 4세는 성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교황권과 황제권의 투쟁에서 대표주자격인 두 사람의 격돌은 밀라노 주교좌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서 비롯됐다. 알렉산데르 2세 때부터 밀라노 지역에서 주교 문제로 자주 폭동이 일어나자 하인리히 4세가 주교를 일방적으로 파면시키고 교황에 의해 성직매매 죄로 이미 고소당한 고드프리를 임명했다. 알렉산데르 2세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밀라노 시민단체가 선출한 오토를 합법적인 주교로 인정했지만 자신의 선종으로 사태를 마무리짓지 못한 상태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이 되면서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시키는 등 교회정화를 시도했으나 교황을 따르는 주교들이 사제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는 등 반대에 봉착했다. 여기서 그레고리오 7세는 폐단 자체보다는 폐단의 근원이 되는 평신도의 서임권 자체를 뿌리 채 뽑아내고자 했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에게 밀라노 주교 임명권에 대해 간여치 말 것을 당부하는 한편 1075년 2월 로마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해 평신도에 의한 성직 서임을 금지하는 법령을 선포하며 27개 항목의 '교황 훈령'을 선포했다.

 

그레고리오 개혁의 기본 지침서가 된 이 훈령은 '교회는 하느님에 의해 설립되었고, 교황은 전체교회의 수장으로서 주교를 임명하거나 해임하고 전임시킬 수 있으며, 교황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성직자로 서품할 수 있다. 교황의 결정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취소될 수 없으며, 교회는 어떠한 오류도 범할 수 없다'로 요약된다.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강조하면서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성을 주장한 교황의 개혁 조치는 오토 1세 이래 지탱해 온 국왕의 권력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과 같았다.

 

하인리히 4세는 때마침 독일 북부의 작센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수긍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그해 여름 반란을 진압한 후 자기가 임명한 밀라노 주교가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며 1076년 1월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개최하여 그레고리오 7세를 파면했다.

 

이에 그레고리오 7세는 그해 2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황제권의 행사를 금지시켰다. 아울러 제국의 신하들에게 황제에 대한 충성선언과 복종 의무를 해제하고 황제를 지지하던 주교들을 파문 또는 성직 수행 금지로 처벌했다. 황제에 대한 전대미문의 이 조처는 미사와 성찬례에 참석하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독일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편으로 황제에게 시달리던 제후들은 황제 제거의 명분을 얻었다. 제후들은 1076년 10월 마인즈의 트리부르에서 회의를 열고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사면을 받지 못하면 황제를 퇴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선출할 것을 결의해 1077년 2월 아욱스부르그에서 교황의 참석하에 회의를 열기로 했다.

 

황제파가 급속히 붕괴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제후들의 동맹을 막기위해 눈덮힌 알프스를 넘어 아욱스부르그 회의에 참석하려고 로마를 떠나 카놋사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을 찾아갔다. 3일간의 참회 끝에 교황은 황제를 사면해줌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도권이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갔다.

 

한편 하인리히를 반대해 그를 제거하려했던 제후들은 교황의 사면에 반대해 대립황제를 세워 황제와 제후들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서 다시 실질적 패권을 회복한 하인리히는 카놋사의 치욕을 잊지않고 교황에게 복수를 결행해 1080년 교황을 다시 폐위시키는 동시에 1081년 로마로 쳐들어가 1084년 함락시켰다.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를 탈출하여 1085년 사망할 때까지 남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연합 세력이던 노르만족의 보호를 받으며 살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였기에 유배지에서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선종했다.

 

그레고리오의 개혁은 실패한 듯 보였으나 그의 용감하고도 고귀한 희생정신은 후세의 모범이 되어 교황의 수위권을 강화시키고 수도회의 개혁을 이끌어 냈으며 성직자의 생활을 쇄신시키는 동시에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확립해 12세기 교황권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10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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