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자료

2011-0227.....연중 8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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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1-02-26 ㅣ No.1003

연중 제 8 주일 ( 가해 )
 
이사야 49,14-15              1코린토 4,1-5              마태오 6,24-34
2011. 2. 27. 등촌 3
 
주제 : 나와 하느님의 관계
사람의 삶은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서양의 이론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 혼자 태어나고, 나 혼자 자라고, 내가 지금 이 모양까지 커 온 일에 부모님이 해주신 것이 무어가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춘기의 사람들이 있기는 해도, 다른 사람과 서로 관련을 맺지 않고 시작하는 사람의 삶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관계의 시작은 나와 부모님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세상의 논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신앙에서는 그 과정을 달리 말한다는 것입니다. 관계의 시작은 나와 하느님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해서, 관계의 시작이 부모님이라고 한다면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에서 말하는 진리를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다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미사 시간에 함께 들어와 있는 사람들,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예비신자교리에 자기 소개를 작성하는 내용에, ‘당신이 신앙에 첫발을 내딛게 된 기회(=목적)는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본보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람들은 그중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라는 보기를 가장 많이 선택했다는 통계를 낸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선택한 사람들의 대답이 틀렸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많은 경우 사람들은 하느님의 일에 대한 나의 태도를 묻는 질문에, 그저 인간의 입장을 말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데서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지난 몇 주간 동안, 주일미사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마태오복음사가가 전하는 산상설교의 예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에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씀하시는 진복팔단의 말씀을 시작으로 해서, 하느님의 뜻을 간직하는 사람으로서 드러내야 할 모양인 소금과 빛으로 사는 사람, 율법과 이웃의 형제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하는 내 몸에 대한 올바른 자세, 내 삶에 억지와 강요로 다가오는 이웃에 관한 일들에 대한 올바른 처신방법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으되, 실현하기가 쉽지 않고 매우 부담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나라와 당신의 뜻을 그렇게 설명하시는 하느님은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그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살이에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담긴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그 뜻을 실천할 방법을 찾는 일도 우리가 하는 걱정과 고민에 들어가는지 분별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삶에서 하는 걱정만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십니다.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가 삶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걱정만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라면, 하느님을 선택하겠는지 재물을 선택할 것인지 하는 고민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정을 먼저 생각할 이 순간에는 재물을 먼저 선택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 하느님도 생각해주고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이익을 얻는다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세상에서 아주 현명하고 똑똑하게 살고 싶다고 하겠지만, 세상의 일들에는 그렇게 좌로, 혹은 우로 왔다갔다 하는 일이 가능할지 몰라도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그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생각을 먼저하고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방(=다른) 민족의 사람으로 살 것인지 그 어떤 것도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처음 선택은 누구나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 선택이 만들어내는 결과도 내 필요에 따라서 이것이나 저것이마 마음대로 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고,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나는 과연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지, 그 선택에 따라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사야예언서 독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을 나를 잊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지도 않을 사람이고,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올바르게 알려고도 하지 않을 사람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시작된 삶이지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지도 않을 사람임은 분명한 일입니다.
 
사람의 시작이 의미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인간이 예측할 수 있고, 인간이 알아내고 인간이 연구한 결론만이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신경 쓰고 살아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바오로사도께서 로마제국 안에서 번영했던 곳이며 환락에 젖었었고 삶에 활기가 넘친 곳이었던 코린토에 살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 삶에 아무런 메아리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대하는지, 하느님은 내게 어떠한 분이신지 묵상할 일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들 각자가 삶을 대하는 자세도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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