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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인가, 교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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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59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인가, 교난인가?

 

 

우리 나라에서는 교회가 창설된 1784년 직후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1882년경까지 100여 년에 걸쳐 천주교 신앙의 실천이 공식적으로 금지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천주교 신앙은 곧 범죄행위로 간주되었고, 국가는 당연히 이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역사에서는 특정 사건에 명칭을 부여하여 그 사건을 기억하며, 역사적 의미를 논한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논하려는 의도 아래 붙인 특정 사건의 명칭에는 일정한 가치가 함축되게 마련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탄압을 표현하는 용어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박해’나 ‘교난’ 또는 ‘사옥’과 같은 독특한 용어들이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용어가 태어난 과정

 

천주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는 정부나 그에 준하는 존재들이었고,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이 천주교 신도들이었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 정부 당국에서는 이를 ‘사옥(邪獄)’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사학(邪學) 곧 ‘그릇된 가르침’으로 규정하였고, 정학(正學) 곧 ‘올바른 가르침’이었던 유학을 지키려고 그에 대한 탄압을 감행한 것이다. 한편, 당시 ‘옥’(獄)이란 단어에는 감옥이란 뜻과 함께, 송사 특히 형사사건에 관한 송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옥’이라고 할 경우에는 ‘그릇된 가르침을 처벌하는 형사사건’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반면에, 피해자였던 천주교 신도들은 보통 군난(窘難)이라고 불렀다. ‘군난’이란 말은 일반 국어사전이나 모로하시[諸橋轍次]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에도 올라있지 않다. 이 단어는 1880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펴낸 「한불자전」(韓佛字典)에 들어있다. 이를 보면 이 단어가 박해 당시 조선교회에서 만들어낸 고유한 말임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군색하고 어려운 시기에 처했다고 보아 이를 ‘군난’으로 표현한 듯하다. 그들은 이 군난이 끝나고 자신의 신앙이 빛나고 드날리게 될 ‘광양(光揚)’의 때에 희망을 걸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기록했던 선교사들은 이를 ‘persecutio’(라틴어)나 ‘persecution’(영어 등)이란 낱말로 표현했다. 이는 강제력과 심리적 수단으로 교회를 탄압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 탄압은 정부의 직접 주도 아래 일어나거나 정부의 선동과 지원을 받아서 다른 집단들이 진행시킨다고 보았다. 그 목적은 신자들을 배교시키고 교회를 말살하려는 데에 두고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이 따르며, 거기에서 역사적 용어가 태어났다.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이를 ‘사옥’으로 규정했고, 피해자였던 당시 교회의 신도들은 ‘군난’으로 불렀다.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용어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박해’라는 말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다.

 

 

탄압 사건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말들

 

오랜 탄압 끝에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게 되었고, 이제 사건은 과거의 일로 기억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조선후기 천주교에 대한 탄압 사건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이를 여러 가지 용어로 부르게 되었다. 물론 유럽의 연구자들은 이 용어상의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되었지만,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한자문화권에 속하던 지역의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다양한 단어로 표현했다.

 

한자문화권에서 한국교회사에 관한 전문적인 글들을 발표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일본인 연구자였다. 1930년대를 전후하여 천주교사를 활발히 연구했던 아카키[赤木仁兵衛]나 이시이[石井壽夫] 등은 ‘박해(迫害)’라는 용어를 썼다. 1944년에 간행된 우라가와[浦川和三郞]의 「조선순교사」(朝鮮殉敎史)에서는 이 사건들을 ‘교난(敎難)’이란 용어로 표현했다.

 

조선인 연구자였던 이능화(李能和)는 1928년에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를 저술했다. 여기에서 그는 ‘서옥(西獄)’ 또는 ‘교옥(敎獄)’이란 용어를 썼다. ‘서옥’은 당시 천주교 신앙을 서학(西學) 또는 서교(西敎)라고 부르던 상황을 감안하여 ‘서학 관계의 형사 사건’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교옥’이란 천주교 신앙이 서교, 사교(邪敎), 천주교 등으로 지칭되던 과정에서 ‘종교와 관련된 형사 사건’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반면에 1931년에 장면은 「조선천주공교회약사」(朝鮮天主公敎會略史)에서 ‘군난’이라는 용어를 썼다. 같은 해에 간행된 이만채(李晩采)의 「벽위편」(闢衛編)에서는 ‘치사(治邪)’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처벌’이라는 의미를 강조했다.

 

해방 이후 천주교사를 연구하거나 서술하는 사람들도 대체로 이렇게 형성된 용어에 의존하고 있었다. 유홍렬(柳洪烈)은 1949년에 간행한 「조선천주교사」(朝鮮天主敎史)에서 ‘교난’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1962년에 간행된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이를 ‘박해’라는 단어로 바꾸어놓았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교난’, ‘교옥’, ‘사옥’ 등의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박해’라는 단어와 ‘교난’이라는 용어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 두 단어를 혼용하는 경우도 있다.

 

 

박해인가, 교난인가?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박해는 “못 견디게 굴어서 해롭게 함”, “남에게 부당하게 압력을 가하여 괴롭히거나 해를 입히는 것” 등으로 되어있다. 교난은 “종교상의 박해나 곤란”, “종교상의 어려움이나 박해” 등으로 되어있다. 생각해 보면 박해라는 단어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반면에 교난의 경우에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모두 인정할 수 있는 비교적 가치 중립적인 용어로 볼 수 있다.

 

천주교 신앙에 대한 탄압사건을 역사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자연법적 권리인 사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에 대한 탄압을 뜻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전은 바로 이 자유의 신장 과정이기도 하다. 발전하는 역사에 있어서 가치 중립이 환관적(宦官的) 중립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 가치 중립은 역사적 진실을 바로 파악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며, 역사의 진실에는 가치판단이 따르게 마련이다.

 

역사는 가치의 학문이므로 그 사건에 대한 가치부여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박해라는 단어도 반드시 객관성을 상실한 주관적 단어라고 규정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역사적 사건에 의미를 부여할 때에는 박해라는 용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구태여 하나의 단어로 통일해서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경향잡지, 2002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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