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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유배지에서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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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5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유배지에서의 생활

 

 

한국교회사의 전반기에 전개된 박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순교했고 또 더 많은 사람들이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물론, 박해시대에 관한 교회 안팎의 기록에는 순교자들에 관한 말이 많이 나오고, 귀양을 떠난 신도들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는 아마도 귀양간 신도들 대부분이 자신의 신앙을 포기한 대가로 목숨을 구한 이들이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신앙을 포기하는 행위나, 자신의 향리를 떠나서 귀양다리 신세를 면치 못했던 신도들의 믿음살이와 살림살이도 우리 교회사의 일부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유배된 신자들과 유배지에서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마땅히 검토되어야 한다.

 

 

귀양이란 무엇인가

 

나라와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국가에서 가하는 형벌 가운데 하나로 귀양이 있었다. 조선왕조 때에 이르러 ‘귀양’이라고 하면 국가가 죄인을 그가 살고 있던 고향에서 일정한 거리나 기한을 정해 축출하는 형벌을 말한다. 귀양은 도배나 유배 등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도배는 일정 기간 특정한 장소에 보내어 노역에 종사시키는 형벌이다. 유배형에 비해 가벼운 처벌이다. 유배형은 중죄를 범했을 때 차마 사형에 처하지는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처벌이다. 물론 유배자의 경우에도 속전을 내거나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특사를 받으면 방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경우가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유배자들은 유배를 떠나기 전에 대개 곤장 100대의 형벌을 함께 받았고, 하급관리들이 죄인을 유배지까지 압송하여 지방관에게 인계했다. 유배지에서 유배자는 그 생활비를 스스로 부담함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유배자는 자신의 처첩이나 자식들과 함께 유배지에서 살 수도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철종 4년(1853년)에 이르러서는 아예 법제화되어 그 가족들은 유배자를 따라가서 살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유배자를 인수받은 지방관은 그 지방의 유력자 가운데에서 보수주인을 선정하여 죄인을 위탁했다. 보수주인은 한 채의 집을 배소로 제공하고 유배 죄인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고, 일정한 기간을 단위로 유배자의 동향을 지방관아에 보고해야 했다.

 

 

누가 유배되었나

 

신도 유배자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유배형의 방식이 적용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창설된 다음해에 이른바 을사추조 적발사건을 겪게 되었다. 이 사건의 과정에서 형조판서 김화진은 체포된 양반 출신 신도들은 방면했던 반면, 중인 출신인 김범우를 충청도 단양 땅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때 김범우는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유배에 처해졌다. 김범우의 경우처럼 유배된 신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신앙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배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가 배교한 신도 대부분은 귀양을 떠나야 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내부 고발자 노릇을 ‘충실히’ 수행한 대가로 재판이 끝난 뒤 방면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배교한 뒤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형벌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 밖의 사람들은 대부분 도배형이나 유배형에 처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9세기 초엽 순조 임금 때에 편찬된 「율례요람」이 있다. 이 책은 각종 범죄별로 여러 사례들을 모아 관아에서 참고하도록 편찬한 책자였다. 여기에는 천주교를 신앙했다가 이를 포기한 사람들이 관청에 적어 바치는 진술조서 양식이 다음과 같이 정리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 부과되는 형벌을 적고 있다.

 

“아무개 저는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사학에 홀려서 사학도들을 따라 몰래 서로 학습하다가 나라의 금지령이 매우 엄중하다는 말을 듣고 학습하기를 폐기하고 개과하고자 하오나, 당초에 학습했던 죄는 면하기 어려우니, 검토하여 조처해 주십시오.: 이러한 경우에는 대명률에 따라 장 1백, 유 3천리에 처한다.”

 

당시 신도들의 배교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관청에서는 이와 같은 서식을 미리 만들어두었다가 문서의 빈칸에 배교한 신자들의 이름만 적어넣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곧 이 기록을 보면 일반 신자들이라 하더라도 배교했다고 해서 곧 방면되지는 않고, 과거의 행적에 대한 처벌을 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때 배교한 신자들은 유배형이나 도배형에 처해졌다.

 

 

얼마나 유배되었나

 

공부했던 이들은 유배자에 대해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유배되었는지를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박해시대 체포된 신자 가운데 순교한 사람보다는 배교하여 자신의 모진 목숨을 이어나간 이들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1801년의 신유박해에 관한 종합적 기록인 「사학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던 신자 가운데 4분의 3정도가 자신의 신앙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자료에서 다수의 신앙 포기자보다는 소수의 순교자를 주목하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앙을 포기했던 다수의 신자에게 우리의 관심은 함께 주어져야 한다. 이들은 순교한 사람보다 더 긴 세월을 예수와 교회를 생각하도록 운명지어졌던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유배지에서의 삶

 

신앙 때문에 귀양다리로 전락한 신자는 유배지 주민들로부터 “희롱과 학대,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1801년에 유배된 사람들은 대왕대비 김씨의 명에 따라 각 지방 고을에 1명씩 보내어 상호 연결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다. 그리고 신도들은 유배지에서 다른 유배자들이나 주민들과도 격리되도록 해야 한다고 명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정부 당국에서는 천주교의 유포를 최대한 막아보려고 했다.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천주교 사건에 관계된 유배자를 관리하기 위한 규정을 특별히 만들기도 했다. 이 규정에는 유배자를 특별한 곳에 구류해 두고 담장 밖에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외부인뿐만 아니라 보수주인댁 집안 사람과의 접촉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시행되고 있던 오가작통 규정을 활용하여 여러 집들이 합심 협력해서 유배자를 감독하고, 닷새나 열흘마다 유배자의 동향을 지방관에게 보고하라고 명했다. 이처럼 철저한 규정이 당시 사회에서 과연 그대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그러나 유배된 신자들은 약간의 예외가 있었겠지만 대개는 이와 같은 규정에 따라 살아야 했음이 원칙이었다.

 

유배지에서 신고로운 삶을 보내던 신자들 가운데 1801년의 유배자 최해두와 같은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참회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배자의 믿음살이와 살림살이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유배된 신자들은 천주교 신앙에 맛들인 바 있었지만, 형편을 감당하기 어려워 배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 짐을 지고 평생을 살아가며 자신의 행동과 그 믿음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경향잡지, 2001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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