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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2015년 예비자교리18 --- 모든성인의 통공과 죄의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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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10-29 ㅣ No.1487

18. 모든 성인의 통공 + 죄의 용서

2015-1023. 이태원

1. 신앙의 힘은 세상의 논리로서 전부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신기하거나 특별한 것을 만들어놓고 신앙이라는 이름이나 범위로 감싸놓은 다음, 그것을 세상의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서 알아듣거나 설명하기가 힘든 것이라고 말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저에게 묻는 사람에게 우리 신앙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시키기란 어렵고도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신앙을 냉소적(冷笑的,=쌀쌀한 태도로 업신여겨 비웃는)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인 것이 분명한 일일 테지만, 실제로 신앙과 세상이 추구하는 바가 서로 다르니 어느 한쪽편의 지식과 자신감만으로는 다른 쪽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신앙세계의 모든 내용을 세상의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눈에 보이는 세상 그 자체에 대한 것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기에 시간과 여유만 허락한다면 우리들 개인이 모를 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 세상의 차원보다는 신앙세계의 차원이 좀 더 높고 심오하고 깊이가 깊다는 얘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본적인 대상으로 하고 그것만을 다루지만, 신앙은 그가 자리를 잡고 있는 세상의 일과 그 세상의 일이 가능하게끔 근거(根據)가 되는 또 다른 세상인 하느님나라,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사정도 함께 다룹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고 해도 오늘 시작에 말한 것처럼, 세상의 입장에서 신앙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피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입장에서 신앙의 세계를 바라보며 다 이해할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론(理論)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 세상이 바라보고 기록하는 신앙의 세상은 신앙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한 세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오늘 다룰 주제로 말하는 죄와 그 죄의 용서에 대한 것도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죄의 용서라고 오늘 주제를 썼습니다만, 믿을 교리에 나오는 내용은 90항부터 계속되는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고 돼 있습니다.

 

3. 세상에 통용되는 말에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낱말의 뜻을 우리말 사전에는, ()양심이나 도의에 벗어난 행위, 벌을 받을 만한 일, ③⦗법률에 위반되어 처벌을 면치 못하는 불법 행위. 범죄.⑤⦗그리스도교하느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행위라고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의 삶에 생긴 죄에 대하여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제시하는 해결방법은 징벌이거나 책임을 묻고 또 그 죄를 추궁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달리 말하면, 신앙에서 말하는 죄의 용서(容恕)에 관한 것을 세상에서는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왜 같은 표현인 에 대해서 다루는 방법이나 대하는 자세가 다르겠습니까? 그것은 그 내용을 규정하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세상에서 그 세상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5. ‘오늘 말씀드릴 교리의 내용/제목모든 성인의 통공입니다. 이 내용을 죄의 용서와 연결하려면, 몇 가지 단계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 자세한 것은 여러분이 훗날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 잘 알아들으시면 될 거고, 오늘은 간단하게 연결하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만들어낸 삶의 결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미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영향을 받는다는 표현을 쓰면, 그것은 개인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내가 미처 모르고 행동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결과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그 영향의 한계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것이라서 내가 영향을 그대로 수용(受容)한다면 다행이지만, 내 의사(意思)와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일의 영향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90. ()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무엇이뇨?

()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세상과 연옥과 천당에 있는 모든 회우(會友)들이 가장 신비하게 서로 결합하고 또한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써 공을 통함이니, 이는 마치 산 몸의 지체가 머리와 서로 결합함 같으니라.

6. 통공이라는 표현은 세상에서 잘 사용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말과 한자로 표현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낱말의 뜻은 분업으로 어떤 일을 이룸이라는 말만 있는 것으로 봐서, 이 말은 이 신앙교리의 시간에 사용할 낱말의 뜻과 차원을 달리합니다. 다시 말해서 글자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90번 내용이 이 말의 뜻을 설명합니다. 국어사전과 얼마나 다를까요?

세상의 용어는 세상의 용어일 뿐입니다. 세상의 언어가 신앙의 모든 일을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입장에서 통공이라는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나보다 먼저 살았던 분들이 하느님에게서 상을 받을 수 있는 덕행을 쌓았다면 내가 그분들의 도움을 입을 수 있다는 얘기고, 내가 세상에서 그러한 정성으로 살고 있다면 이제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자기들의 몸이 없으므로, 좋거나 나쁜 결과를 맺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없으므로, 그들을 기억하는 세상의 내가 만들고 쌓은 덕행과 그 결과를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서도 양보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앙에서는 통공이라고 말합니다만, 이 현실세상을 넘는 하느님나라자체를 긍정도 할 수 없고 부정도 할 수 없는 세상의 입장에서는 그 통공이라는 일이 가능할 거라고 믿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7.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한 얘기는 한계가 있는 삶과 그에 연결된 결과를 맺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복된 소리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수 있도록 완비하지 못한 것을 나보다 앞서 산 사람이나, 나보다 뒤에 살 사람이 만드는 삶의 좋은 결과나 덕행의 결과로서 채울 수 있다는 소리이니 말입니다. 이 일이 세상에 드러날 때, 한쪽으로 치우친 면도 있어서 종교분열이라는 모습, 천주교와 개신교의 분열이 된 모습의 한 가지 행동(1517)도 되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벌인 행동의 결과이지,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그러한 의도를 갖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내용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8. 세상의 모습에서 유아기(乳兒期)의 사람들이 드러내는 모습은 오로지 남에게서 받는 생각만 하고 그러한 과정을 우선으로 합니다. 혹시나 해서 아닌 경우가 있어서 판단이 항상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평균치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냈던 어린시기의 사람도 성장하면서 청년기를 거치고 장년기가 되고, 노년기에 이르면 자신이 삶에서 무슨 일을 얼마나 했고, 그러한 일들이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 돌아보게도 되고 묻게도 됩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은 욕심이 많을 법한 유아기에 머무는 인간으로서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원숙한 사람으로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베풀었는지를 묻는 자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9.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자세는 이렇습니다. 제가 먼저 일반적인 자세를 말씀드렸습니다만, 반대로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받는 것을 목표로 삼아 그게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유아기에 머무르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삶을 통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의 기쁨도 느낄 수 있고, 찾을 수 있어야 사람이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와 이미 세상의 삶을 마친 사람들, 또 아직은 태어나지도 않고 살아있는 사람도 아니어서 그들과 연결되는 일치를 말하는 것은 세상의 삶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신앙의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 붙잡혀 사는 것은 현실적(現實的)이기는 해도, 그 세상의 폭이 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삶이 그들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현실의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91. () 이 결합의 효험은 어떠하뇨?

() 이 결합의 효험은 회우들이 성교회의 은혜를 같이 받고, 기도와 선행으로 서로 도와줄 수 있음이니라.

10.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과 먼저 산 이들 그리고 아직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연결되는 의미를 먼저 말했습니다만, 그 내용을 91번 문답에서는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내용이니, 한번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92. () 대죄있는 회우도 이 통공에 참여하느뇨?

() 대죄 있는 회우는 온전히는 참여하지 못하느니, 온전히 참여하기에는 은총지위가 필요하니라.

11. 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신앙의 내용은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은총과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 함께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확인할 수 있고 오고가는 것과는 달리, 신앙에서는 당연히 를 판단의 중요한 근거로 삼습니다.

믿을교리 편에서 자세하게 다룰 내용은 아니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알거나 의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따라, 죄의 크기는 대죄와 소죄로 구분합니다. 말은 쉽게 대죄, 소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나아가면 죽을죄에 해당하는 대죄가 되는지, 얼마나 뒤로 물러서면 죽을죄는 아닌 소죄에 머물 수 있는지 완전히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12.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을 대하는 자세에서, 자기가 가진 의지를 다하여 거부하고 행동한 결과인 대죄상태에 있을 때는 그가 하는 어떤 행위도 하느님을 앞에 모시는 옳은 자세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 통공에 참여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한 내용입니다. 세상 삶에서는 내 모습을 어떻게 포장하는지 그 포장기술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도 다르고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자세도 달라집니다만, 신앙에서는 겉으로 그렇게 드러나는 모습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은 겉모습만 볼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만, 이럴 때 말하는 내용에는 개인이 드러내는 자기변호에 해당하는 주장이나 그런 내용만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13. 어렸을 때 들었던 죄의 크기와 구별에 대한 얘기에서 재밌어서 지금도 기억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대죄는 인간을 죽게 하는 죄이면서도, 하느님을 슬프게 하는 죄이고, 소죄는 인간을 죽을죄까지 이끄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을 섭섭하게 하는 죄라는 표현입니다. 슬프게 하는 것과 섭섭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특별하게 제시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느낌으로도 알 수 있는 이런 표현에 따라, 우리가 행동하거나 드러낼 기준을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93. () 천주교회에 죄를 사()하는 권()이 있느뇨?

() 있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니라.

14. 죄의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그 죄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용서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일에서는 말 그대로 순수한 의미의 용서(容恕)를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고 그 모든 것을 다 말하기는 애매하기 때문에 이 용서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93번 문답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5. 죄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죄를 없애거나 용서하는 기준도 달라집니다. 세상의 경우라면, ‘사람의 목숨을 해치거나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것을 죄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그에 비교해서 신앙에서는 세상의 기준처럼 드러나는 일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뚜렷한 기준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그 뜻을 벗어나서 행동하거나 사는 것을 가리켜 죄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그 죄의 결과로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죄이고, 멀어지는 결과를 맺는 것이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결과를 없애는 것이 죄의 용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16. 하느님은 세상만물의 주재자(主宰者,=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하는 사람/대상)이시니, 사람들이 지키고 따라서 살아야 할 규정들을 만들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묶어 맬 수도 있고, 풀어줄 수도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하느님을 향해서 죄를 지었으니, 그 죄의 결과도 하느님의 힘으로 풀 수 있는 거라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신앙에서는 죄의 용서를 말합니다. 용서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입장이라면 아무런 잘못이나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게 만들어준다는 의미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신앙에서도 그것이 죄의 용서가 될 것입니다.

94. () 어떤 때에 죄를 사하느뇨?

() 성세성사와 고해성사를 행할 때 죄를 사하느니라.

17. 신앙에서 죄의 용서를 얘기하는 경우는 2가지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에서 죄와 그 결과가 사라지는 것을 죄의 용서라고 말할 때, 하느님의 힘으로 용서를 선언하는 경우의 첫째는 세례성사이고 둘째가 고해성사입니다. 세례성사는 그 성사를 거행할 때까지 그가 갖고 있었던 원죄(原罪)와 그가 지은 죄(=본죄)와 그 결과를 모두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해성사 때 용서되는 죄는 고해자가 올바로 준비한 경우, 그가 지은 죄와 그 결과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경우입니다.

18.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일정한 규칙과 규정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 규칙과 규정을 형식(形式)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표현하면서, 거부해야 할 것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만,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나름이고 대하기 나름입니다. 형식이라고 해서 모두 다 거부하거나 내팽개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형식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모두 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사항을 설명하지 않거나 설명하지 못해도 그 형식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나 그렇다는 한계는 있습니다.

19. 죄의 용서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을 떠나서 인간이 최고의 존재인양, 제 멋대로 행동해서 만들어낸 삶의 결과에서, 다시 하느님을 으뜸으로 모시고, 그 뜻을 받들고 살겠다는 자세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죄의 용서를 말하면, 우리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는 없고,)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는 딱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반발해야 정상이 되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여, 그렇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에 알맞은 결과를 만들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는 대로 그 아는 것에 맞추어 행동하고 실천하려고 애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20.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죄이든지 선이든지 갈 수 있고, 가보고 싶은 끝까지 다녀오거나 해보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해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세상의 존재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입니다. 그 일은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때, 그때가 되면 하느님의 축복으로 우리의 삶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 순간이 우리의 삶에 실현된 때까지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고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통공이라는 말의 뜻과 죄의 용서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장 좋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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