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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김종교와 최필공, 최창현과 한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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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4 ㅣ No.833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김종교와 최필공, 최창현과 한덕운

 

 

김종교 프란치스코(1754-1801년)는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의원이었습니다. 가난한데다가 호감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이벽 세례자 요한은 그를 상당히 아끼면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김범우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1794년 5월 체포되었을 때는 마음이 약해져 풀려났는데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뵙고 신앙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저는 (1794년에) 세례명을 받으면서 사학을 올바른 도리로 인정하였습니다. 이제 형벌과 문초를 당할지라도 조금도 뉘우칠 생각이 없습니다. 예수를 위해서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이를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라며 신앙을 고백하였고,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47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최필제 베드로의 사촌 형으로 성품이 곧고 의지가 굳센 최필공 토마스(1744-1801년)는 1790년 46세 때 최창현에게 교리를 배웠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형조에서는 그를 “흉악하게 굳게 참으면서 목석처럼 완악하기만 한데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대부모를 위해 죽는 것이 실로 효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배를 치거나 협박을 하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말을 하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자처럼 굴고 있으니 미혹을 깨우쳐 살려줄 길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양반 가운데 권일신과 중인 가운데 최필공이 만약 통렬하게 스스로 후회하여 정학으로 돌아온다면 다른 무리는 바람을 만난 홍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정조의 명으로 그는 집중적인 회유를 당하였고 결국 굴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필공의 마음에는 여전히 천주 신앙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고, 1799년 8월 다시 체포되어 문초를 받을 때는 1791년 배교한 자기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심정을 고백하였고 이번엔 임금이 그를 풀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과거의 열성을 되찾아 성심껏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1800년 음력 12월 17일 형조에 다시 체포되었고, 1801년 2월 11일 문초에서 “저는 이미 죽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무릇 천주학은 유식한 선비가 마땅히 이를 믿었고, 일반 평민 중에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자 또한 이를 믿었습니다. 저는 결단코 믿음을 바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고 단언하였습니다. 마침내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중인 출신 총회장 최창현 요한(1759-1801년)은 1795년에 순교한 최인길 마티아의 집안 조카입니다. 1784년 겨울 이벽에게 교회 서적을 얻어 보았고, 정약전에게서 교리를 배웠으며,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표양이 순수하고 말수가 적으면서도 타당하여, 사람들이 의혹이 생기거나 곤란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을 한 번만 보아도 자기가 당면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일이 아니며 어려운 일이 아님을 스스로 깨달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말은 몇 마디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졌습니다. 도리에 대한 강론은 자세하고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었으므로, 비록 듣기 좋게 말할 생각이 없이 나오는 대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즐겨 들으며 싫증을 내지 아니하였고, 그의 말이 마음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이 받는 신심의 이익이 컸습니다. 그의 순명과 겸손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었고, 남보다 특별히 뛰어난 점도, 흠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교우들 중에서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황사영 백서, 32-35행).

 

밀고자가 데려온 포졸에게 체포된 그는 처음에 포도청으로 끌려갔으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곧바로 의금부로 가 문초를 받았습니다. 최 요한은 한때 마음이 약해졌으나 은총이 다시 그를 붙들어주어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고,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42세였습니다.

 

한덕운 토마스(1752-1801년)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1790년 입교하였고,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했습니다. 천성적으로 강하고 거침없던 그는 기도와 영적 독서에 아주 열심이었으며, 교우들을 격려할 때에는 그의 심장과 똑같은 힘찬 말들이 그들의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을 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몇 차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고, 배교했던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훈계하여 신앙을 회복하도록 하였습니다. 1801년에 체포되어 주리형과 몽둥이로 찌르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인내로 참아 받았고, 기쁜 안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남한산성 동문 밖 사형장에 다다른 그는 턱을 받치게 되어 있는 버팀목을 자신의 손으로 들고 망나니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단칼에 내 목을 베어라.” 하였습니다. 세 번째 칼을 받고 순교한 그를 다블뤼 주교님은 “이 시기의 가장 훌륭한 신앙 고백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니, 끔찍한 고문들을 받으면서도 의연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했으며 강렬하고, 힘차고, 마음을 꿰뚫는 언변으로 천주교를 변론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형벌로 한순간 넘어졌지만 신앙을 회복하였던 순교자 김종교와 최창현, 정조의 명으로 회유당했지만 다시 신앙을 회복하여 순교한 최필공, 고문 속에서도 의연하게 순교한 한덕운 순교자들은 한결같이 순교를 갈망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또한 순교를 갈망하면서 순교의 삶을 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8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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