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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시복시성 절차법 해설: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시복시성 절차와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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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16 ㅣ No.823

[시복시성 절차법 해설]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시복시성 절차와 과정

 

 

시작하며

 

시복시성은 영웅적인 성덕을 증언하거나 순교한 신자들에 대해 신학 · 역사적 조사를 하여 신앙의 전형으로 삼는 교회법적 소송 절차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200주년을 맞이하며 103위 순교 성인의 시성식을 거행하는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후 신유박해를 전후로 한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에 대해 많은 관심과 염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현재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자의 시복 안건과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 증거자의 시복시성 안건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유럽 교회와 비교할 때 교회 역사가 길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시복시성이라는 단어는 한편으로 생소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호기심이 일어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필자가 위의 두 안건에 관련된 일을 해왔기에 이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할 기회가 이 지면을 통해 생겼습니다.

 

시복시성이라는 작업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딱딱하고 다루기 힘든 소재를 정리하는 일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하기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6회에 걸쳐 시복시성 과정과 의미, 시성 절차법의 해설을 시도하게 됩니다. 부족한 이 글을 통해서 시복시성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한국 교회의 순교자와 증거자들의 현양에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

 

1839년의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조사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범 주교가 시작하였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1838년 말에 몇몇 신자들이 체포되자 그에 대한 박해 보고서를 작성하였던 것입니다. 이 보고서에는 1838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의 순교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체포되기 몇 개월 전부터 정하상 바오로와 현경련 베네딕타에게 순교 사적의 정리를 맡겼으며, 이문우 요한, 현석문 가롤로, 최영수 필립보 등에게도 같은 임무를 부여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기해일기”입니다.

 

1845년 초 조선에 일시 귀국한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는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마카오의 리브아 신부에게 보냈습니다.

 

1847년 페레올 고 주교는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포함한 “증보판 기해일기”(프랑스어본)를 완성하여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습니다. 1847년에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이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하는데, 이것이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입니다. 이 행적은 1847년 10월 15일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되었고, 이로써 한국 순교자의 시복 소송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다블뤼 안 주교는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 조사 작업을 지속하여 1858-59년 사이에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비망기 제5권)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다블뤼 주교는 1785년부터 1846년 사이의 순교자 210명을 시복 대상자로 선정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자료 수집 과정 중에 이기경의 ‘벽위편’, 이순이 루갈다와 이경도의 옥중서한을 발견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다블뤼 주교는 자료 수집과 연구를 계속하였고, 1860년에 “조선사 서설”(비망기 제3권), “조선 순교사”(비망기 제4권)의 저술을 마무리하였습니다.

 

1866년의 병인박해로 중단된 시복 자료 조사와 정리 작업은 1876년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이 작업은 1880년 뮈텔 신부가 입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기해일기”의 전사본과 “상재상서”, 천주가사인 민극가의 “삼세대의”와 이문우의 “옥중제성” 등을 발견하여 예부성성으로 보냈습니다. 뮈텔 신부는 1890년 제8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계속 자료 조사를 지휘하여 1894년 황사영의 ‘백서’ 원본을 발견하였고, 관변 측 자료들을 정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교황청의 시복 관련 움직임을 살펴보면, 1857년 9월 24일 비오 9세 교황의 윤허를 받아 예부성성은 ‘안건 착수에 대한 심문 요항’(Positio super Introductitione causae)을 발표합니다. 이로써 82명의 순교자는 ‘가경자’가 되었고, 교황청이 주관하는 시복 조사를 한국에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교황청 조사는 한국 천주교회에 위임되어 시행되어야 했으나, 박해 상황으로 시복 조사 위임장조차 전달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위임장은 1864년 12월과 1866년 9월에 발송되었으나 박해로 전달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박해가 끝난 뒤 자료 조사가 재개되자, 1879년 5월에 예부성성은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조사에 아무런 장애가 없음”을 선포하였습니다.

 

1882년 5월에 시작되어 1887년 4월에 종결된 교황청 조사를 위한 법정에서 블랑 신부가 판사, 뮈텔 신부가 위임판사(1885년부터는 푸아넬 신부), 로베르 신부가 서기로 활동했으며 42명의 목격 증인들이 심문 조사에 임했습니다. 여러 번의 검증과정을 거친 뒤 1905년 7월 26일 예부성성에 ‘기해 · 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을 제출하였습니다.

 

교황청에서는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관계자 회의를 마무리하여 그해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79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습니다. 하지만 82위 가경자 중에 정 아가다, 김 바르바라, 한 안나는 증거 불충분으로 복자품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는 1876년부터 시작되었고, 1880년 뮈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부터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1884년에는 뮈텔 신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자료 및 예비 조사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890년 뮈텔 신부가 제8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고 나서 예비 조사 작업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895년에 이르러 르 장드르 신부는 877명의 순교자 전기를 “치명일기”라는 책자로 간행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차원의 교구 시복 재판은 1899년에 열렸는데, 위임판사는 르 장드르 신부, 청원인은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기는 홍병철 루카 부제가 맡았습니다. 6월부터 진행된 증언 청취는 다음해 11월까지 135회에 걸쳐 100명의 증인이 출석하여 이루어졌습니다.

 

1901년 병인박해 순교자 29위의 조사 기록 10권을 예부성성에 제출하였고, 1914년 5월 13일 이를 승인받아 1918년 11월 13일 시복 안건의 착수를 허락받았습니다. 1919년 7월에 교황청 조사를 위한 교회 재판이 서울교구에 위임되었으며 증거가 불충분한 이성천, 이성욱, 송성보 등이 탈락하여 26위만이 ‘가경자’로 선언되었습니다.

 

1921년 2월부터 1926년 3월까지 129회에 걸쳐 85명의 증인들을 대상으로 교황청 재판이 열렸고, 법정의 판사는 드브레 보좌주교가 맡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병인박해 치명사적”이 자료집으로 정리되었습니다.

 

교황청 재판 기록은 모두 8권으로 묶어 교황청으로 발송되었고, 1952년 3월 2일에 그 유효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연이은 교황청 시복 관계자 회의를 거쳐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최종심의 과정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푸르티에 신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 신부가 복자품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 또한 컸습니다.

 

 

한국 순교 복자 103위 시성

 

103위 한국 순교 복자는 기해 · 병오박해 순교 복자 79위와 병인박해 순교 복자 24위가 합해진 것입니다. 103위 복자의 시성 안건은 1971년 12월에 열린 주교회의에서 다루어졌습니다.

 

1975년 9월 전국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의 모임에서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과 103위 복자의 시성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신자들의 결의와 염원의 타당성을 인식하신 주교님들은 1976년 4월에 열린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103위 복자들의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고자 담당주교에 김남수 안젤로 주교를 선출한 것입니다.

 

주교회의는 1977년 10월 로마 유학 중인 박준영 루도비코 신부를 로마 주재 법정 대리인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1978년 4월 13일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시성 안건이 교황청에 정식 접수되었습니다.

 

이 안건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입안되고, 변기영 베드로 신부가 그 실무자로, 윤민구 신부가 로마 청원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82년 11월 로마의 추기경회의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행사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초청하였으며 그에 대한 확답까지 들었습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시성 추진 관계자들은 1984년에 103위 복자의 시성식을 추진하려고 더욱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복자가 성인이 되려면 한 건 이상의 기적적 치유나 표징이 증명되어야 하는데, 선교 지역인 한국 교회는 103위 복자들의 전구로 말미암은 기적적 치유 현상이 있었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체계와 수단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주교회의는 논의를 거쳐 1983년 3월 24일 ‘기적 심사 관면 청원서’를 작성하여 교황청에 제출하였습니다.

 

1983년 9월 27일의 특별회의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03위의 시성을 승인하고 이를 선포하였습니다. 드디어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103위 복자의 시성이 선포되는 감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마무리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시복시성 작업은 1838년 말에 시작된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와 ‘순교록’의 정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847년에 기해 · 병오박해 행적(라틴어본)이 교황청에 제출되면서 본격적인 시복 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1984년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이 탄생하기까지는 140여 년의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 절차의 시작과 진행은 오랜 세월 동안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완결된 103위 성인의 시복시성 과정은 이땅의 구원 역사 안에 깃든 하느님의 은총과 순교자들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103위 성인의 탄생에 얼마나 많은 정성과 세월이 소요되었는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103위 성인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 전구를 청하는 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류한영 베드로 - 신부.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총무. 청주 연수동성당 주임.

 

[경향잡지, 2010년 7월호,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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