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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안중근의 친인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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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87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안중근의 친인척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유력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그와 관련된 친인척의 존재가 함께 부각되기도 한다. 유럽의 교회사에는 역대 교황 중에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지탄받은 인물도 나타난 바 있다. 살아있는 권력자가 친인척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는 일은 혈연을 중시하던 전근대 사회의 유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친인척 관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오늘날에도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곤욕을 치른 인물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안중근은 죽어서도 친인척 관리에 남다른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애국선열’이며 ‘신앙인’이었던 안중근의 모범은 그의 친인척을 채근하여 민족 독립을 위한 바른 길로 내닫게 했다.

 

 

안명근의 독립운동

 

안중근의 친인척 가운데 독립운동을 했던 주요한 인물로는 안명근(1879-1927년)을 들 수 있다. 그는 안중근의 중부(仲父)인 안태현의 맏아들이다. 안명근은 1910년 말에 발생한 ‘안악사건’ 혹은 ‘안명근 강도사건’의 주모자로 등장한다. 안악사건은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자 황해도 일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안명근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강도급 강도미수죄로 종신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그가 체포되던 과정에는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개입되어 있었다. 뮈텔 주교는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선교하던 빌렘 신부를 통해 안명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이었던 아카시 장군이었다. 아카시는 일찍이 파리 주재 일본 공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했고,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는 프랑스인 선교사 뮈텔 주교와 가깝게 지냈다. 거기에는 물론 조선에 나와있는 선교사들을 회유하려던 식민당국의 복선이 깔려있었다. 그런데 뮈텔은 안명근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카시에게 직접 찾아가 알려주었다. 물론 뮈텔의 제보가 있기 전부터 총독부 헌병경찰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뮈텔의 행동에 대해 총독부에서는 특별한 감사를 표시했다.

 

뮈텔 주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조선 천주교회가 안중근 사건으로 일본 식민지 당국자들에게 실추당한 체면을 회복해야 한다는 교회행정가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이 일로 안명근의 체포는 앞당겨졌고, 안명근의 독립운동 사건은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혹은 ‘105인 사건’으로 확대 조작되어 많은 애국지사들이 죽음과 고통을 강요당했다.

 

뮈텔 주교는 안명근의 형이 확정된 다음 그의 석방을 위해서도 노력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나타난 뮈텔 주교의 단견은 한국교회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안명근은 1926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어 신천 청계동에서 교회 일을 거들다가 나중에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전교사업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어떤 신자의 병자성사에 배석하고 나서, 이질에 이환되어 일주일 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 밖의 친인척들

 

1930년대 초 상해에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경근이 있었다. 그는 안중근의 숙부인 안태민의 맏아들이었다. 안경근은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바 있고, 1925년에는 중국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만주에 세워진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0년 상해로 와서 백범 김구를 보좌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했고,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밀고자를 수색하던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해방 이후에도 안중근의 가문과 연결되는 인물들에 관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예로 우선 최익형을 들 수 있다. 그의 아내는 안명근의 누이였던 안익근이었다. 그는 처남인 안홍근과 함께 해방 이후 황해도 옹진으로 이사하여 옹진중학 서무주임을 하면서 적산 과수원 1만여 평을 매입하여 이를 함께 경작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국군 5인을 자신의 과수원에 숨겨주었다가 1950년 10월에 발각되어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그해 10월 15일경 후퇴하던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안홍근의 셋째 아들은 안무생이었다. 안무생은 일제말엽 간도지방의 교우촌 가운데 하나였던 해북촌에서 살다가 강도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아내 차로길은 결혼 뒤 남편의 성을 따라 아예 안로길로 개명할 만큼 안씨 가문의 아내 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안로길 루치아는 남편이 죽자 하르빈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중국에 인민정권이 들어선 1949년 이후 그녀는 중국 천주교 애국회에 참여를 반대하던 김선영 신부와 임복만 신부를 도와 일하다가 이들이 투옥되자 그 옥바라지를 감당해 갔다.

 

 

남은 말

 

안중근의 친인척에게 안중근은 평생 우러러야 할 사표였고, 옳은 길을 걷도록 이끌어주던 길잡이였다.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집안의 사람들은 때로는 그 어른 때문에 자신의 행동거지에 제약을 받는 부담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안중근의 친인척들은 대부분 안중근과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삶을 본받고자 했다.

 

안중근의 조카 중 하나로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안춘생(安椿生)도 있다. 그를 비롯하여 안중근의 가계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민족의 광복을 위해 투신했다. 그들은 신고(辛苦)로운 삶을 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의 추적을 당했다. 민족이 해방된 이후에도 그들은 남한정권의 이승만에게 배척당하거나, 북한의 인민군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이들의 삶은 탄압받고 찢겨져 있던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엮어준 것은 안중근이 믿던 천주교 신앙이었고,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민족애였다. 우리에게 안중근과 그 친인척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교회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경향잡지, 2003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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