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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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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7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었나?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으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나오면서 처음으로 한 인간적 행동은 옷을 입는 일이었다. 창세기의 저자는 그들이 수치심 때문에 몸을 가리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수치를 아는 마음은 문명과 윤리의 시초이다. 이는 문화를 일굴 줄 아는 인류의 출현 당시부터 옷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지난날 사람들은 거친 들판생활에서 몸을 보호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려고 옷을 입었다. 조선시대의 옷은 사회적 신분이나 처지를 상징했다. 박해시대의 선교사들은 이름을 조선식으로 바꾸었듯이 조선식 옷을 입었다. 그들은 조선옷을 입으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선교사들이 본 조선옷

 

조선 사람들의 입성은 원래 대륙의 스키타이 계통과 중국의 복식문화라는 두 요소를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옷 속에 자신의 혼이 깃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죽은 이의 옷을 흔들어 혼백을 불렀다. 남녀의 옷을 구별해 빨았고 같이 걸어두지도 않았다. 이처럼 조선옷은 그 관념과 외양에서 분명 서양의 옷들과는 차이를 드러냈다.

 

조선의 입성에 관한 관찰 기록은 신 푸르티에 신부의 편지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는 우선 ‘흔히 직경이 60cm도 더 되는’ 전형적인 양반의 갓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 모자가 햇볕이나 추위로부터 머리를 보호해 주지도 못하는 비실용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조선의 버선과 탄력성이 있는 서양의 양말을 비교하면서 버선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짚신이 값은 싸지만 쉽게 닳고 불편하며 발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푸르티에나 칼레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주로 심미적 관점보다는 실용적 입장에서 조선의 옷을 평가하려 했다.

 

한편, 그들은 조선인들이 색깔 있는 아름다운 옷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주로 무명 흰옷을 입고 있어서, 옷이 늘 때에 찌들어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부자들조차 이가 득실거리는 찢어진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도 양반의 일상복이었던 도포와는 성격이 다른 잠방이나 등걸이 같은, 근로하는 백성들의 간편한 노동복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선교사들은 이를 입어보거나 주목하지 않고 자신들의 눈에 이상하게 비친 남자 양반들의 옷을 중심으로 조선의 의복을 서술하고 그 비실용성을 강조했다. 그들이 흰옷의 폐단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도 조선옷의 비실용성을 강조하려던 의도의 일환이었다.

 

 

선교사들이 입은 조선옷

 

선교사들은 조선옷에 불만이 많았지만 조선에 입국하여서는 조선의 옷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고 차츰 조선화되어 갔다. 조선옷을 입었던 첫번째 선교사는 1801년에 순교한 주문모 신부였다. 그는 얼굴 모습이 조선인과 비슷했으므로 조선에 입국하기 직전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조선식으로 꾸몄다.

 

박해시대 서양인 선교사들도 평상복으로는 조선의 옷을 입었다. 특히 칼레 신부는 그 생김생김이 조선인과 비슷하여 조선인의 일상복을 입고 다녔다. 그는 문경새재를 지나가다가 군졸의 검문을 받았지만 벙어리 행세를 하여 체포를 모면했다. 경상도 한실에서 전교할 때 갑자기 이졸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에도 한 여교우가 그를 벙어리인 자신의 시아버지라 속여서 위기를 넘겼다. 조선옷이 그를 살려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길을 다닐 때 상복을 입어 자신의 자태를 감추어야 했다.

 

조선시대 양반층의 상제(喪祭)는 투박한 베로 지은 상복으로 몸을 감싸고, 얼굴 전체뿐만 아니라 어깨와 가슴까지도 가릴 수 있는 방갓을 썼다. 그리고 외출할 때에는 늘 부채나 막대기 두 개에 잡아맨 조그만 회색 헝겊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가 말을 걸어올 때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길과 주막에서는 방안이나 외딴 구석에 물러가 있어야 했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언제나 상복으로 변장해야 나다닐 수 있었다. 이 상복은 서양인의 다른 모습을 가리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선교사는 커다란 방갓을 쓰고 길을 안내하던 교우의 버선 신은 짚신 발뒤꿈치만 보고 따라가야 했다. 물론 이때 자칫 다른 사람을 따라가게 되어 당황했던 선교사도 간혹 있었지만 말이다.

 

상복이 자신을 감추는 데에 이용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 황사영은 최설애가 지어준 상복을 입고 도망을 간 적이 있다. 이러한 경험은 1830년대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들에게 원용되었다. 상중에 있는 양반의 복장과 예절은 쉽고 완전하게 변장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섭리 같다고 선교사들은 자주 말했다. 그런 변장 없이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머물거나,    특히 천주교인들 사이를 왕래하기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1866년 병인박해 이래로 선교사들이 쓰던 이 방법을 조정에서도 알아차리고 상복제도를 개정하자는 말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대비하실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얼마 뒤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수단을 입게 되었다.

 

 

남은 말

 

조선의 투박한 상복은 박해시대 조선의 교회와 선교사를 보호해 주었다. 그들은 자신을 숨기고 낮추려던 이 투박한 옷 안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인들은 그리스도의 새 말씀을 새겨듣고, 은총과 구원의 의미를 궁구해 나갔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당당한 서양옷을 갖추어 입고 대로를 활보하고, 문명의 전파자로 군림하려 했을 때 우리 사회는 그들을 ‘양대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조선의 문화는 상제에게 자신을 낮추려는 겸허한 자세와 투박한 상복을 입혀주었다. 선교사는 겸허와 질박의 상징이었던 상복 속에서 올바름을 선포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들이 조선 문화의 맥락에 섰을 때 조선에 대한 선교가 가능했고 그들은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상제처럼 자신을 낮추려는 겸허한 자세에서 조선은 은총과 구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조선의 교회는 이 자세를 잃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교회는 근대에 이르러 승리자의 날렵한 옷차림에 번쩍이는 구두를 신으려 했다. 조선이 그리스도의 은총과 구원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멀어만 갔다.

 

[경향잡지, 2003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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