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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젊은 신앙 공동체의 고뇌 - 황사영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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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04

[신앙 유산] 젊은 신앙 공동체의 고뇌 : 황사영 백서

 

 

머리글

 

한국 교회사를 보면 1801년 우리 교회는 정부 당국으로부터 본격적인 박해를 당했었다. 흔히 신유 교난(辛酉敎難)으로 불리는 이 박해의 과정에서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서양 세력의 도움을 요청하는 비밀 편지를 중국에 발송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유 교난을 더욱 가열시킨 자극제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회를 비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오늘날 상당수의 역사 연구자들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근거를 두고 서양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이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논증하려 한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교회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 죽은 황사영을 원망하거나 사건 자체에 대한 언급을 가능한 한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엄연히 우리 교회의 지난 일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며, 황사영이 남긴 ‘백서’도 우리 교회사의 어둠을 밝혀 줄 수 있는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백서가 작성되던 당시의 배경이나 그 내용 등에 관해 간단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젊은 신앙 공동체

 

한국 천주교회는 젊은이의 종교 운동 결과로 성립될 수 있었다. 이 점은 초창기 교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의 연령을 조사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즉,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이승훈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교회를 세워 나갔다. 명도회장 정약종은 24세 때에 입교하였고, 총회장 최창현도 교회가 창설되던 1784년에는 25세에 지나지 아니했다. 이존창이나 정약전 동 교회 지도자들도 20대 청년이었다. 이벽은 교회 창설 당시 20대를 갓 넘긴 31세의 젊은이였다. 물론 교회사 초창기의 인물들 중 영세 입교시의 연령이 40대 내외에 이르렀던 권일신(42세), 유항검(38세), 최필공(46세) 등도 있었지만 초기 교회의 중요한 특정 가운데 하나는 젊은 청년의 교회였다는 점이다.

 

‘백서’를 작성했던 황사영도 당시 26세의 젊은이였다. 이 20대 전후의 청년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당시의 교회를 젊은 신앙 공동체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젊음은 왕성한 탐구욕을 상징하며, 새로운 사상과 문화 창조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바로 젊음의 이 특성과 관련하여 새로운 종교 운동으로서 천주교 신앙의 선포 작업도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젊음은 시행 착오를 통해 성장하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확률이 다른 어느 연령층보다도 높다고 하겠다. 젊음의 추진력이 어설픈 시행 착오로 전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젊은 추진력에는 원숙한 노년의 충고가 때때로 요청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황사영의 ‘백서’를 읽으면서 이와 비슷한 감상을 갖게 된다.

 

 

황사영은 누구인가

 

황사영은 남인 명문 출신으로 16세 나이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던 청년 기예였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했고 이때를 전후해서 천주교 교리에 접하게 되어 이후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는 관직 진출을 완전히 포기하고 서울에서 신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생활했다. 그리고 그는 20대 전후의 젊은 시절부터 교회 활동에 투신하여 신유 교난 직전에는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황사영의 이름은 바느질 품을 팔던 교우 아녀자에게까지 알려졌으며,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당시의 한 교우도 그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1801년에 단행된 박해의 과정에서 교회를 이끌던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은 거의가 죽음을 강요당했다. 교회의 지도자였던 황사영도 정부 당국의 추적을 받았으나 요행히 피신할 수 있었다. 그가 피신한 곳은 제천 땅 배론[舟論]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박해 과정에서 살아 남은 유일한 교회 지도자가 자신임을 확인하고, 박해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의 의무를 느꼈다. 그리고 그는 박해의 종식과 교회의 재건 방안에 대해서도 고뇌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비단에 편지를 작성해서 이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다. 이렇게 하여 백서는 작성되었지만, 이것이 북경 주교에게 전달되기 전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 처참을 당했고 그의 가족들은 연좌율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되었다.

 

 

백서란 무엇인가

 

백서는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비단에 써서 보내려던 비밀 편지이다. 이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깨알같이 작은 붓글씨로 122행, 13,311자가 채워져 있다. 이 백서의 70% 이상에 해당되는 부분은 신유 교난에 관해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분은 기록을 중시하던 선비 황사영이 남긴 중요한 사료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지도자 황사영은 박해의 상황 보고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백서의 91항 이하 부분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청 나라의 힘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서양 세력의 무력 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서양 선박 수백 척과 병력 5-6만 명을 동원해서 조선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도록 강박해주기를 요청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소망은 당시의 객관적 세계 정세에 비추어 보아 실현될 수 없는 허황한 것이었다. 그 허황된 생각을 담은 편지도 중국 교회에 전달되지 못한 채, 그는 체포되었고 대역부도 죄인으로 죽음을 당했다.

 

 

‘백서’에 대한 평가

 

‘백서’는 신유 교난의 전개 과정을 알려 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황사영 알렉산델(*나중에 황사영의 세례명이 알렉시오라는 사실이 밝혀져 현재는 알렉시오로 부릅니다)의 믿음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신앙 유산’의 하나로 인정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서’의 대안 제시 부분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외부의 무력으로 말미암을 굴종까지도 감내하려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흔히 반민족주의적이며 제국주의 침략의 주구적 입장으로만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제국주의 침략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제국주의는 1870년대 이후에야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가 성립되기 70여년 전의 행동이 제국주의적 행동으로 규정되는 것은 일종의 시대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의 태도를 반민족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할 수만도 없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민족주의는 개항기 이후에 이르러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 줄 수 없다.”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대원칙을 어긴 것이다. 바로 이 측면에서 우리는 백서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황사영의 ‘허황된 대안’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대한 인식의 미숙성 때문에 나온 것이다. 청년 황사영의 판단 착오로 말미암은 오류의 결과는 젊은 신앙 공동체에 더 많은 고통을 요구했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백서’를 통해 교회에 대한 한 청년의 사랑과 고뇌를, 그리고 그 청년의 추진력과 시행 착오를 동시에 확인하게 된다.

 

[경향잡지, 1990년 9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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