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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남녀의 새로운 위상, 동정부부 - 이순이 누갈다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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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03

[신앙 유산] 남녀의 새로운 위상, 동정 부부 : 이순이 누갈다의 편지

 

 

들어가는 맡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넘치는 신앙에의 기쁨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담은 글들을 남기고 있다. 그 글들은 일기나 편지의 형태로, 또는 “옥중기”나 “천주가사”의 형태로 그리고 저서로 정리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 글들은 박해 시대 신자들이 가졌던 믿음이나 생각의 특성을 가장 잘 전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초기 교회에 관한 자료 중에는 이순이(李順伊) 누갈다가 남긴 두 통의 편지가 있다. 흔히 ‘이 누갈다 서한’으로 불리고 있는 이 펀지는 1801년 신유 교난 당시의 우리 나라 교회 상황을 간접적으로 전해줌과 동시에 순교를 목전에 둔 한 아녀자의 올곧고 고운 마음씨를 전해 주고 있다.

 

 

새로운 깨달음의 시대

 

이순이(1781~1802년)는 새로운 깨달음의 사태를 살았던 순결한 여인이었다. 그가 살았던 당시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때에 이르러 양반 사대부 중심의 사회 질서가 이른바 ‘아랫것들’에 지나지 아니하던 민인(民人)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다. 남성 중심의 사회 문화는 서서히 흔들려 갔으며, 여성들의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지탱해 주던 성리학(性理學) 일변도의 사상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기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이를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하던 일단의 지식인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또한 이 새로운 신앙은 역사의 현장에서 주인공으로 성장해 왔던 민중들에 의해 수용됨으로써 그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의 천주교 신앙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천주교에는 선각적 지식인들과 억눌려 지내던 민중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평등을 강요당하던 여성들도 이 새로운 종교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사회 문화적 분위기에서 이순이는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고 순교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순이와 그 형제들

 

우리 나라 여성의 이름 가운데 가장 순박하고 정감 어린 이름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순이라는 이름이리라. 그러기에 예로부터 많은 문학 작품에서 ‘순이’가 등장하고 있으며, 오늘의 작가들도 ‘순이’를 즐겨 들먹이고 있다. 우리 교회사에 나타나는 많은 여인 중에서도 ‘순이’들을 찾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이순이’는 ‘강완숙’과 함께 초기 교회사의 전형적 인물이다.

 

순이네 집안 내력은 이러하다. 그의 아버지는 지봉 이수광(李?光)의 후손인 이윤하(李潤夏)였다. 이윤하는 근기(近畿) 남인 계통의 지식인으로서 이가환(李家煥) 등과 친밀히 지내고 있었다. 순이의 어머니는 당시에 가장 저명한 학자였던 권철신(權哲身)의 동생이었다. 순이의 오라버니 이경도(李景陶)는 1801년의 박해 때 순교했고 오라비 이경언(李景彦)도 1827년에 순교했다. 물론 이순이도 1801년에 시작된 신유 교난의 과정에서 순교를 하여, 그의 집안은 천주교 신앙을 증거하다 철저히 파괴되었던 초기 교회의 대표적 가문이다.

 

이순이는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집안의 분위기에 힘입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새로운 신앙을 가장 철저히 실천하기 위해 동정의 삶을 살기로 했다. 이순이는 당시의 사회 관습상 호남 벌의 부호 유항검의 아들 중철(重哲)과 결혼을 했었다. 그러나 유중철과 이순이는 여느 부부들과는 달리 남매처럼 지냈던 동정 부부였다.

 

 

편지가 쓰여진 까닭

 

1801년은 우리 나라의 초기 교회에 있어서 무척이나 괴로운 시련의 시기였다. 이때 전국적인 규모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서울이나 경기 그리고 충청도 내포 지방과 전주에서는 신도들이 줄뒤짐을 당했고, 순교와 배교가 연이어 졌다.

 

이때 전주 지방의 대표적 신도였던 유항검도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항검의 가족 거의 모두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유중철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했다. 유항검 · 유중철 가족 구성원 중 아녀자들은 당시의 연좌율(連坐律)에 의해 시골 관아의 관비(官婢)로 보내져야 했다. 그러나 이순이를 비롯한 그의 시어머니, 시숙모 등은 자신들의 천주교 신앙을 고백하며, 자신의 남편 및 형제들과 함께 공동 정범(共同正犯)임을 선언하고 연좌율의 적용을 거부했다. 이로써 그들도 신유년 말경에(양력으로는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당해 순교했다.

 

이순이는 전주 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두 통의 편지를 쓰게 되었다. 이 편지 중 하나는 그의 어머니 권씨에게 보내는 짤막한 글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친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상당히 긴 편지이다. 이순이는 자신의 신앙과 자신의 처지를 전하고, 살아 지낼 친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편지에 담긴 내용

 

이순이는 이 두 통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열렬한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는 여기에서 주문모 신부로부터 받아 모신 성체에 대한 짙은 신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1798년 유중철과 함께 동정 서원을 한 이후 이를 지켜 왔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형제에 대한 애틋한 우애를 드러내고 있으며 내세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현세적 고통에 대한 인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 편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그의 신앙과 삶은 18세기 후반기를 막 넘어선 당시의 상황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성리학적 윤리관에 대한 결연한 거부를 표현했다. 그의 동정 생활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한 삶을 뜻함과 동시에 남편에 얽매어 지내야 했던 여인네의 일반적 관행에 대한 일대 도전이기도 했다. 그는 이로써 성리학적 남녀 윤리를 거부하려 했고, 남녀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려 했다. 편지에서 나타나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는 이땅에 새로운 사랑의 불을 지피려 했던 결단의 표현이기도 했다.

 

 

남은 말

 

‘순이’라는 이름은 순해 터진 이땅의 아낙네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 순한 아낙들의 강인한 삶이 우리 역사와 문화의 반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순이는 나약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나약하지만은 아니했으며, 그 굳고 질긴 믿음을 통해 이땅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해 준 인물이었다.

 

이순이의 편지는 그의 큰오빠 이경도가 1801년에 순교하기 전날 어머니 권씨에게 보낸 편지 및 1827년 전주옥에서 유사한 동생 이경언의 편지 등과 함께 “발바라 초남이 일기 남매”라는 제목으로 필사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중 이순이의 편지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천주교회사”(상권)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경향잡지, 1990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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