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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성모 마리아 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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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19 ㅣ No.300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성모 마리아 신심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신심 가운데 하나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있다. 이 신심은 조선 교회의 창설 직후부터 전파되었다. 그리고 박해시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오늘의 우리보다 월등히 강한 성모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 신심을 특별히 존중하고 발전했던 까닭은 가톨릭 신앙과 조선의 전통문화가 만나서 서로의 장점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둘의 결합을 통해서 성모신심은 더욱 풍요로워졌고, 조선의 신자들은 기쁘게 살 수 있었다.

 

 

교회창설 초기의 성모 마리아 신심

 

조선왕조 전통사회에서 가장 중시하던 덕목은 부모에 대한 효도였다. 당시 사람들은 ‘엄한 아버지와 인자하신 어머니’[嚴父慈親]에 대한 효도를 인간 본성의 일부로 보았다. 효도라는 윤리는 인간관계가 가질 수 있는 균형과 절제, 그리고 따스함의 표현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도는 임금에 대한 충성의 기본이 된다고까지 생각했다. 전통사회에서 강조하던 ‘인자하신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감정은 조선 교회의 신심에도 녹아들었다. 어머니를 향한 효도라는 감정은 바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주었다.

 

박해시대 선조들은 한문으로 저술되어 우리말로 다시 번역된 교회서적을 통해서 성모 마리아를 만나기 시작했고, 성모께 대한 각별한 신심을 실천했다. 성모 마리아는 어린 자식을 이끌어주고 보살펴주는 지혜롭고 인자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1797년 6월 9일 충청도 정산고을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이도기(李道起)는 그와 같은 어머니 마리아께 지극한 순종의 마음을 표현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이 어머니의 명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까지 생각했었다. 어머니의 명에 순종하는 자세를 효도의 첫걸음으로 이해해 왔던 우리 전통문화에 따라 그는 자연스럽게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순종을 다져나갔다.

 

성모께 의지하고 감사드리며 살던 박해시대 신자들의 생활은 여러 자료를 통해서 거듭 확인된다. 곧 1801년에 순교한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살아남은 두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모께 의지하여 마음을 놓으시고 우리 주님[吾主]의 어좌(御座)가 되기를 힘쓰셔요.”라고 말했다. 그들의 삶은 성모께 의지하는 삶이어야 했다. 1801년 청주에서 순교한 김사집의 경우에도 자기 아이들에게 이러한 편지를 써서 “천주와 성모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신도답게 살아가도록 힘써라.” 하고 마지막 당부를 했다.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기록에서 성모 마리아를 ‘인자하신 어머니’[慈母, 慈親]로 받들었던 또 다른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1833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옥사한 황석지(黃石之, 베드로)는 수원 고을 샘골에서 살았다. 그는 40세에 이르러 천주교 신앙을 배워온 집안이 함께 입교했다. 영세 이후 그는 자식과 아내를 먼저 여의고서도 자식들과 아내가 착하게 살다가 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불러가신 데 대해 감사를 드렸다.

 

그 후 황석지는 홀로 서울에 살던 조카의 집에 얹혀살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도대장은 그가 백발이 성성한 것을 보고 동정심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에게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황석지는 이를 거부하고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순교자가 되고자 했고, 자신의 사형판결문에 기꺼이 서명하였다. 당시에는 관례적으로 사형이 확정되면 곧 형이 집행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8개월이나 감옥에 머물러야 했다.

 

이에 황석지는 “하느님께서 자기의 희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되자 이를 불안히 여겨서 끊임없이 동정 성모 마리아께 의탁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엄한 아버지가 자신의 소청을 들어주기에 주저할 때, 인자하신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어린이와 같은 맑은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에게 성모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하느님아버지께 전달해 주는 분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가 이러한 인식을 깊게 가질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엄부자모’에 대한 효심을 기초로 하여 다져갔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순교자 윤점혜와 성모 마리아

 

가톨릭교회의 성모신심 가운데 하나로는 성모 발현과 관련된 여러 일을 들 수 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와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사에서는 그 초기부터 성모 발현과 관련되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신자들이 그만큼 가톨릭 신앙을 철저히 수용했던 결과로 나타나는 형상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1801년에 순교한 윤점혜(尹占惠)에 관한 기사에 주목할 수 있다. 달레(Dallet) 신부가 지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1790년대 윤점혜의 성모신심과 성모 발현의 체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윤점혜 아가타는 그의 어머니가 성사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그것을 몹시 한탄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동정 성모와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꿈이나 마귀 요술이 아닐까 염려하여 윤점혜 아가타는 그 발현 이야기를 선교사에게 하였더니, 주문모 신부는 그것을 좋게 해석하여 그의 마음에 평화를 돌려주었다. 또 한 번은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보았다. 성령이 하늘의 모후 위에 내려와 그 성심 위에 앉는 것같이 보였다. 지극한 겸손으로 윤점혜 아가타는 이러한 하느님의 은혜가 실제적인 것이라고 감히 믿지 못했고, 만약 주문모 신부가 윤점혜에게 나타났던 분과 똑같은 상본을 보여주며 그의 걱정을 가라앉혀 주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물리쳤을 것이다.”

 

윤점혜가 체험한 이 발현은 사적(私的) 체험이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체험을 판단하는 데에도 신중을 기하였다. 윤점혜는 물론 당시 자신이 읽었던 천주교 서적을 통해서 성모 발현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악령의 유혹으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교회의 경고까지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체험을 공공연히 내세우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단순한 환상이거나 악령의 유혹이 아닐까 걱정했다. 주문모 신부는 윤점혜에게 그 체험이 하느님의 은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그를 안심시켜 주어야 했다.

 

특히 박해시대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강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성모 발현과 같은 사실은 매우 크게 주목받을 수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윤점혜는 자신의 체험을 떠벌리거나 이를 가지고 어떠한 현세적 이득을 얻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간직한 채 봉사의 삶을 살면서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또한 윤점혜가 겪었던 성모 발현에 관한 사실들은 당시 교회에서 결코 과장되거나 선풍적 관심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박해 당시의 교회와 신자들의 신심이 매우 차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전통문화에서는 효심을 표현하는 데도 ‘엄한 아버지와 인자하신 어머니’라는 조화와 균형의 감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균형감은 아마도 윤점혜가 가졌던 성모신심을 바르게 이끌고, 성모 어머니에 대한 신심이 가져야 할 한계를 그가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윤점혜가 체험했던 이와 같은 사실들은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져 오다가 1830년대 교회사 사료를 수집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채록되어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남은 말

 

박해시대 우리 교회에서는 가톨릭의 전통 가르침에 따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제시해 주었고, 마리아 신심은 당시 우리나라 교회의 중요한 영성적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조선 교회에서 성행하던 성모 마리아 신심은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마리아 신심과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특별히 강조하던 우리 전통문화가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더 깊게 이해되었다. ‘엄한 아버지와 인자하신 어머니’의 개념에 익숙해 있던 박해시대 신도들에게 성모 마리아는 자신들의 믿음을 키워주고, 그 소망을 하느님께 전달해 주는 ‘인자하신 어머니’ 그 자체였다.

 

또한 성모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분이었다. 마리아는 신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엄중한 순간에도 그들을 보호하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가는 분으로 인식되었다. 성모신심을 통해서도 우리 문화와 신앙의 아름다운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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