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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앞서간 교구장들의 마지막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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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10 ㅣ No.299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앞서간 교구장들의 마지막 길

 

 

우리나라 천주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교구가 세워진 때는 1831년이었다. 조선교구의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 이래 그의 뒤를 이어 많은 사목자들이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봉사해 왔다. 조선교구는 서울대교구로 이어졌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13명의 교구장이 거룩한 신앙의 전파를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가운데 3명의 교구장은 순교했고, 성인이 되어 높임을 받고 있다. 교회사에서 교회의 지도자, 교구장의 죽음은 교회사의 한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이는 그들의 삶이 그만큼 의미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는 교구장의 죽음과 그에 대한 당대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박해시대 교구장의 죽음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교회의 선교를 위해 어려움을 무릅써야 했고, 갖은 고생 끝에 조선의 국경 가까이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35년 10월 20일 갑자기 병이 들었다. 그와 동행하던 중국인 라자리스트 회원 카오(高)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조선 교회와 선교에 대한 그리움만을 안은 채 내몽고 지방의 한 교우촌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고 주교와는 다른 길로 가던 모방(Maubant)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걸음을 재촉해서 주교가 서거한 신자마을 마쟈즈(馬架子)에 도착했다. 그는 11월 21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눈을 감겨드린 카오 신부의 복사를 받으며 장례식을 지냈다. 영결미사를 지낸 두 명의 성직자와 마쟈즈 교우촌과 그 부근의 교우들만이 그가 세상을 하직하는 마지막 길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교구장의 주검은 마쟈즈 근처에 있는 산 남향판 교우들 무덤 사이에 묻혔다. 이것이 초대 교구장의 장례식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조선에 입국을 하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죽게 되리라는 예감을 표현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조선을 잊지 않고 조선을 위해 기도하리라는 결심을 함께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도 그의 이 마음을 잊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무덤은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내몽고의 궁벽한 시골에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는 죽은 다음 96년이 지나고서야 복음을 전하고자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자신의 교구에 비로소 다다를 수 있었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은 앵베르(Imbert) 주교였다. 그의 죽음은 더욱 극적이었다. 그는 1839년의 박해 때에 2명의 선교사와 많은 신도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신문을 당했다. 주교와 신부들은 사형을 선고받기 전 각기 치도곤 70대를 맞았다. 이렇게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은 국가의 근본을 위태롭게 한 대역죄인(大逆罪人)이 되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했다.

 

그들은 형장에 도착하여 웃옷을 벗기고 바지만 남겨놓았다. 그런 다음 군사들이 그들의 손을 가슴 앞에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지르고 화살로 귀를 위에서 아래로 꿰뚫고, 얼굴에 물을 끼얹고서 회를 한줌 뿌렸다. 그러고 나서 몽둥이를 붙들고 광장을 세 바퀴 조리 돌려 군중의 조롱과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듣게 했다. 끝으로 그들의 무릎을 꿇리고, 군사 12명이 손에 칼을 들고 그들 주위를 빙빙 뛰어 돌아다니며 싸움하는 흉내를 내며 지나는 결에 각기 한 차례씩 칼로 목을 쳤다. 제2대 교구장은 이렇게 죽었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간 효시를 한 후 강변 모래밭에 매장하였다. 약 20일이 지나서 조선 신자들은 엄격한 감시를 무릅쓰고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훔쳐냈다. 앵베르의 시신은 오늘날 서울 서강 부근에 있는 노고산에 매장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1901년 명동성당 지하성당으로 옮겨졌다.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은 치욕스런 죽음을 강요당했고, 죽은 후에도 예를 갖추어 묻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참다운 믿음의 증거자로서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에 대한 기원은 세상 종말의 날까지 이어질 것이다.

 

 

뮈텔 대주교의 죽음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은 1890년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개항 직후 조선에 몰래 들어와서 선교하다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교수로 귀국했다. 그 후 그는 조선교구장이 되어 다시 조선에 들어왔고 신앙의 자유를 가져오고자 진력했다.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그는 우리나라 순교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 힘썼고 ‘제도 교회’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43년간 교구장의 직책을 수행하다가 1933년 1월 23일 노인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 다음과 같은 한 통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나이다. 아멘. 이는 나의 유언이라.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손으로써 나의 영혼을 천주께 바치고, 내가 평생 로마 성교회의 신앙을 위하여 죽기를 원하고, 또 이 신앙으로 항상 살았거니와 이제 이 신앙을 받들고 죽노라. 나의 생명이 비록 미소한 것이나 조선인의 구령을 위하며 또한 조선 지방에 가톨릭교회가 전파되기를 위하여 감심으로 내 생명을 바치노라. 천주께서 나를 조선 지방 전교신부로 차정하여 주심을 감사하며, 또 나를 두 번씩이나 조선에 불러주심을 감사하며, 조선에 이렇듯이 오래 머물게 해주신 막중한 은혜에 감사하노라.

 

나의 허다한 죄와 나의 불신불충함과 은총을 헛되이 쓴 죄를 천주께 용서하여 주시기를 겸손되이 간구하오며, 나의 구세주의 무한히 인자하심에 나를 받들어 맡기나이다. 모든 신부와 수녀와 모든 교우들에게 내가 혹시 좋지 못한 표양을 준 것이 있었으면 용서하여 주기를 청하노라. 내가 일부러 하지 아니하였지만 혹시 모르는 사이에 저들의 마음을 상한 것이 있으면 또한 잊어버려 주기를 청하노라. 저들이 혹시 내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나는 벌써부터 진심으로 다 용서하여 주었노라.

 

모든 이들이 피차 서로 애덕의 사슬로 결합하기를 청하노니, 이 애덕의 사슬은 조선 모든 신부들을 항상 결합케 하였도다. 내가 이 애덕으로서 간청하노니 불쌍한 나의 영혼을 위하여 기구하며 또 다른 이로 하여금 기구케 할지어다.”

 

이렇게 기도했고 용서를 청하며 서로 사랑하기를 갈구했던 뮈텔 대주교의 장의 행렬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장의행렬의 선두에는 평양청년회, 부인회, 소년군, 교우일동의 조기(弔旗)와 일본인 교우 각 단체, 성내(城內) 성외(城外)의 각 단체, 각 지방 본당의 여러 단체의 조기가 빽빽하게 늘어서고 좌우에 촉대로 시위한 십자고상을 받들고 용산 대신학생이 열을 짓고, 그다음으로 좌우 배종한 14명 가운데로 각하의 관여가 들어섰다. 그 뒤로는 각하의 훈장과 80여 명의 신부들과 조복을 정제한 30여 명의 연도반이 따르게 되고, 그 뒤를 따라 수녀단체, 외국인, 일본인 교우단체, 소신학생, 동성상업 · 계성 · 가명보통학교 남녀 학생, 각 회장 단체, 그다음으로 허다한 교우가 열을 지어 늘어섰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발인할 시각이 임박하니 공중에 높이 솟은 무령(無靈)한 종각도 최후의 이별을 못내 슬퍼하듯이 처량한 종소리로 목을 놓아 통곡하는 중에 각하의 관여는 40여 년간 성직을 봉행하시던 대성당을 뒤로 두시고 천천히 움직여 마지막 하직의 길을 떠나셨다. 이렇게 전후 2천여 명의 행렬로 호위되어 복잡한 경성 시가를 엄숙하고 진중하게 지나고 한적한 용산 삼호정 성직자 묘소에 이르러 머물렀으니, 여기가 각하의 세상 종궁까지 거하실 처소이다.”

 

1933년 1월 26일에 민덕효 대주교 각하의 장례식은 그렇게 끝났다.

 

 

남은 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죽은 이가 생전에 누리던 지위나 영예에 따라 죽은 직후에는 관성적 존경과 타성적 칭송이나 평가가 진행된다. 그러한 평가는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평가의 기준이 사랑이나 평화, 그리고 진리 · 정의 · 자유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초했을 경우에만 그 긍정적 평가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를 기리며, 자신의 행동을 추스르게 된다.

 

믿음을 위해 증거자가 되었고, 신앙의 자유를 이 땅에 가져온 선임 교구장들의 뒤를 이어받아 김수환은 제12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에 취임했고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스스로가 ‘바보’였던 그는 순교성인과 선임자들의 기원에 힘입어 사목하고자 했다. 그는 성직자로서 길을 걸으며, 마음이 선한 많은 이들의 기원이 되다가 2009년 2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존경과 애도가 넘쳤고, 전 · 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40여만 명이 조문을 다녀갔다. 그가 떠나는 마지막 길을 지켜본 사람만도 2만 명이 넘었다. 이는 그가 생전에 했던 일에 대한 일차적 평가였다. 그 평가에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선임 교구장들의 순교와 자기희생에 대해 바치는 감사의 마음도 잠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은 김수환 추기경과 시대를 같이하여 살 수 있었음에 감사하면서, 자신을 버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또 다른 성직자의 출현을 기원하고 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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